초록의 공명

(2007-06-20 14:48:13)
이계삼
내신을 옹호할 것인가
“차라리 수험생 부모의 소득세· 재산세 고지서를 전형 자료로 쓰라 그래라”

서울 시내 주요 사립대학들이 내신 4등급까지를 만점으로 처리하겠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이다. 저들의 시도란 서울 강남 아이들, 과고나 외고나 자립형 사립고 아이들을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데려가겠다는 눈물겨운 수작이고, 다른 말로 ‘물 안 좋은데서’ 학교 다닌 어금버금한 촌놈들이 제 학교 문턱 넘는 꼴은 차마 볼 수 없다는 치사한 몸부림이다.

대학이 자본의 똘마니가 된지는 이미 오래고, 그들에게 지성의 권위나 공공적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우리 대통령에게서 마이크를 빼앗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될 것이다.

교육부와 <한겨레>가 오랜만에 죽이 맞아 내신을 옹호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이런 의문은 떠나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과연 내신을 옹호해야 하는가. 내신이 교육공공성을 위한 차선책이라도 되는 것일까. 지금의 내신 논란이 중대한 분깃점이 될 것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공공성을 지키기 위해서 아이들이 3년간 열 두 번이나 수능 치르듯 떨어야 하는, 2005년 첫 번째 중간고사를 앞두고 몇 달 사이 열명이 넘는 아이들이 자살했던 이 살벌한 경쟁을 우리가 옹호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간단치가 않다. 추상적인 원칙과 구체적인 고통 앞에서 가르치는 사람은 무엇을 택해야 할까.

나는 지금 같은 문제의 틀 속에서는 절대로 답이 없을 거라고 본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했으면 한다. 논술도, 내신 논란도, 지금 대학입시를 둘러싼 모든 담론은 아무리 넓게 잡아도 상위 30% 이내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우린 나라에서는 이런 것들이 ‘교육 문제’ 노릇을 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7~80% 아이들은? 그 아이들이 상위 30%의 변별력을 위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제도에 억지로라도 자신을 끼워맞추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어떤 좌절을 겪고 있는지, 그 좌절의 상처가 아이들의 영혼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우리는 살펴야 한다.

그리고, 80~100% 아이들, 이른바 ‘깔아 주는’ 아이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은 대개 가난하며, 가정이 성치 못한 아이들이 많다. 그들은 음지 식물들처럼 엎드리고 있다가 때로 무시무시한 사건으로 사회 전면에 등장하기도 한다. 교육 현장에서 그들은 ‘폭탄 돌리기’ 게임 하듯 기피되는 대상이고, 모쪼록 사고 없이 졸업해서 사라져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교육은 없다.

전교조는 상위 30%뿐 아니라 나머지 80~100% 아이들까지 공평하게 사랑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조직이다. 한국 교육에서 제도 개선의 역사란 다만 파행의 반복이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리라. 쇳덩이라도 뚫을 것 같은 저 욕망들을 어찌 이 가냘픈 제도가 다스릴 수 있을까.

그런데, 갑자기 이런 걱정이 든다. 전교조는 이 내신 논란에서 무슨 역할을 하기는 할 수 있을까, 라는. (전교조신문 2007.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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