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공명

(2007-06-18 18:13:29)
이계삼
국어교사로 살아가기
<국어교사로 살아가기>
1.
안녕하세요. 젊은 놈이 겁도 없이 “국어교사로 살아가기”라는 주제를 덜컥 받아들고 책상 앞에서 낑낑대고 있습니다. 그저께 학교에서 소풍을 갔는데, 점심을 먹고 아이들과 반별로 장기자랑이나 게임을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우리 반 아이들 노는 모습을 찍으며 느긋하게 구경하는데, 갑자기 사회 보시는 선생님이 제 노래를 청해 듣자고 분위기를 유도하는 거였습니다. 너무나 당황스럽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손사래를 치면서 저항을 하다가, 사회자랑 아이들이 신이 나서 자꾸 약 올리고(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똥퍼요 ~ 뭐 그런 수작 있잖아요) 그러니깐 기분이 조금씩 풀리더니 슬금슬금 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고개를 쳐드는 겁니다.

급기야 못 이기는 척하고 일어나서 어설프게 한곡 부르고 나서 다시 낭패감에 젖어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지요. 오늘 이 자리도 아마 그렇게 되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아닌 척해도 수줍어하거나 겸손하게 버티는 자세 한켠에는 세상 앞에 나서서 뭔가 발언하고 싶고, 그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현시욕이 있고, 그래서 둘 사이가 밀고 당기지만, 항상 후자가 이기게 되더군요. 그래서 글도 쓰고 이렇게 말도 하면서 사는가 봅니다.

그러나 이런 기회에 저 스스로도 그간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얼버무리고 말았던 제 사고의근원도 들춰보고, 이를 통해 오늘 모이신 분들께 의미 있는 생각거리라도 던져 드릴 수 있다면 제 이야기를 마친 뒤의 허탈함이나 낭패감 같은 감정들은 어느 정도 보상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은 아마 저보다 훨씬 더 열정적인 국어 선생님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사실 제게도 이렇게 국어과 연수를 열심히 쫓아다니며 뭔가 배워보려고 몸부림치던 시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배움터를 좀 가리면서 다니게 됩니다. 그 사이 경력도 조금 쌓였고, 수업이나 학급 운영에 대한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또, 이것저것 많이 바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제 이런 변화에는 좀 근원적인 맥락도 작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맥락을 들춰 보는 게 오늘 이야기의 핵심이 될 것 같습니다.

2.
국어교사는 말과 글을 가르치는 자입니다. 이를테면 인간의 언어생활을 모국어를 매제로 하여 드러내고, 거기에 담겨 있는 의미를 다음 세대에게 전수해주는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므로 국어 교사는 모름지기 언어에 특별히 민감한 존재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셈이지요. 대학 다닐 때, 철학 강의를 듣다가 비트겐슈타인 부분을 상당히 흥미롭게 공부한 기억이 있습니다. 뭐, 자세한 건 거의 잊어버렸지만, 이런 이야기는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헤겔이 전제하듯이 본질이 불변하거나,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본질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현실 속에서 소통되는 맥락 그 자체가 곧 본질이라는 거였습니다.

저는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해서 보습학원 강사를 한 2년정도 했는데요, 그때 정말 열심히 가르쳤고, 또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기억 중에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는 정병욱 선생의 <잊지 못할 윤동주>를 가르칠 때의 일입니다. 제가 워낙 윤동주를 좋아하니깐, 그 글과 긴밀히 관련돼 있는 <별 헤는 밤>을  열심히 가르쳤겠지요. 저는 제 감정에 겨워서 한껏 침을 튀기는데, 아이들은 이해가 잘 안 된다는 표정이었어요. 그래서 진땀을 빼면서 ‘왜 느낌이 안 오냐’며 재우쳐 묻기도 했는데, 한 아이의 답이 이런 거였습니다. “선생님, 저희는 서울에서 나고 자라서 하늘에 그렇게 별이 총총한 걸 본 적이 없어요.” 하는 거였습니다.

그때 제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일하던 학원이 서울 성북구 삼선동이라는 곳에 있었는데, 전형적인 강북 분위기의 복닥거리는 동네였어요. 밤새 불이 환합니다. 캄캄한 밤이 별로 없고, 거기다가 매연 때문에 하늘이 늘 그렇게 뿌옇습니다. 그 동네 언저리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는 <별 헤는 밤>의 정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원체험이라는게 아예 없다는 거지요.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겁니다.

이런 상황과 만났을 때 교사의 역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헤는 밤>의 아름다움을 각인시켜야 하는 게 아니라, 실은 그 시의 아름다움이 소통될 수 없는 현실적 ‘맥락’에 주목하고, 그것을 통해 <별 헤는 밤>의 의미를 재구성하는데 있다는 겁니다. <별 헤는 밤>의 아름다움은 불변의 텍스트가 아닙니다. 1960년대, 70년대의 <별 헤는 밤>과 2000년대 서울이라는 메트로폴리탄 시티에서 이른바 후기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별 헤는 밤>은 ‘본질적으로’ 전연 다른 텍스트입니다. 요컨대, 언어에 민감한 국어 교사라면, 고정된 텍스트에 갇혀있으면 안 되며, 그것이 소통되는 현실적 ‘맥락’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함께 여는 국어교육>에도 이런 고민을 쓴 적이 있지만, 저는 한 2-3년째 책읽기, 글쓰기, 논술 교육 앞에서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저도 한동안 필독서나 권장도서도 선정하고, 독서 기록장이나 쓰기 공책 따위를 통해 무척 열심히 책읽기와 글쓰기를 가르쳐왔습니다. 논술도 마찬가지구요. 그런데 갈수록 뭔가 의혹이 생겼습니다. 이게 아이들에게 좋은 것일까, 하는 믿음이 제 스스로에서부터 조금씩 약해지는 것을 느낀 겁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근무해서 이런 경향이 더 심하고 노골적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좋은 책을 던져주고, 잘 조직된 주제와 자료로 글쓰기 과제를 제시하더라도 평가와 연동되는 순간 아이들은 기꺼워하지 않는, 이른바 ‘학습된 무기력’이 우선 자리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사는 지도 과정에서 아이들의 부담을 줄여주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구조적 문제’를 발견한 겁니다. 고교 내신 성적이 상대평가 체제로 바뀐 최근 2-3년간 이런 경향이 더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평가에 반영되지 않는 자유로운 책읽기와 글쓰기를 이끌어내기가 참 힘들어졌습니다.

물론, 광동고 송승훈 선생님이나 여러 선생님들의 사례를 보면 이런 객관적 한계 속에서도 참으로 대단한 성과를 일구어내고 계셨고, 그래서 그런 분들에게는 진심으로 머리가 숙여졌지만, 저는 그게 참 힘들었습니다. 교사는 책읽기와 글쓰기가 ‘어쨌든 좋은 것’이라는 믿음으로 다가갑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는 교사와 부모 세대의 강권과 입시에서 당락의 열쇠를 쥐고 있는 논술의 부담까지 더해서 받아들입니다. 그 순간, 아이들에게 책읽기와 글쓰기는 다른 맥락으로 ‘전화’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책읽기와 글쓰기는 일단 부담스러운 것으로, 그리고 교환가능한 가치-이를테면 높은 등급, 상장, 더 나아가 입시제도에 필요한 방편-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화하는 것입니다. 저는 몇 년간 고민을 거듭했고, 그래서 지금은 제가 할 수 있는 책읽기와 글쓰기 교육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읽어야 하는 책이라면, 더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한 글쓰기라면 안 읽고, 안 쓰는 게 차라리 낫다는 거지요.

그래서 제가 하는 일이란 그냥 제가 담임하는 교실에 작은 학급 문고를 만들어서 생각날 때 책 골라 읽도록 분위기 만들어주고, 매일 일기를 쓰는 학생에게는 수행평가 태도점수에 만점을 주는 식으로 권장하는 정도입니다. 독서나 쓰기 과제는 가급적 삼가려 합니다. 대신 아이들과 함께 모둠일기는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사실, 이미 국어과가 아니라도 전 교과에 독서와 서술형이 포함되면서 아이들이 읽어야 할 책의 권수와 써야 할 글의 양이 예전보다 엄청 늘어나 있기 때문에 거기에 더 얹어주는 것은 우선 아이들에게 미안해서라도 잘 안하게 되더군요. 논술은, 제가 학교에서 몇 년간 논술을 해 왔고, 달리 맡을 사람도 없는 처지에서 제가 파업을 할 순 없으니, 태업을 하고 있습니다. 전교조 일에 바쁘기도 하고 그래서 실은 그렇게 할 만한 시간이나 체력이 허락하지도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많이 미안하고, 그래서 저도 고민입니다.

이런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 데에는 제 개인적인 체험도 한 몫 한 것 같습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도서관도 없었고, 책읽기를 가르쳐주는 선생님도 잘 없었습니다. 이외수나 이문열 류의 소설책을 가끔 빌려 읽긴 했지만, 교양서라 할 만한 책은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대학에 가서부터 책도 읽고, 글도 쓰게 되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그 시절에 지금 아이들처럼 수준 높은 책을 읽거나, 논술 같은 거창한 주제를 두고 낑낑대지 않아서 의식화가 뒤늦어지기도 했지만, 또한 예민한 시기에 흔한 ‘말과 글에 의한 오염’도 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결국 저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에 담겨 있는 ‘한국적 맥락’에 대한 절망 때문에 이렇게 방황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여러 선생님들과의 치열한 토론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4.
그래서 저는 세상을 향한 문제의식으로 옮아가게 됩니다. 진정한 교육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아이들과의 우정의 소통을 가로막는 현실적 맥락으로 관심의 지점이 움직인 것입니다.  

제가 교직 생활을 할수록 깊이 느끼게 된 건, 특히 한국 교육에서는,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공식 교육과정보다 잠재적 교육과정, 혹은 외곽 요소의 규정성이 훨씬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교육이 아닌 ‘교육 문제’가 교육 마당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보면 수업계를 맡은 선생님보다 보충수업계를 맡은 선생님이 훨씬 바쁩니다.

수업계는 2월말 3월초만 고생하고 나면, 그 뒤로부터는 교사들의 근태 상황에 따라 수업을 조정하는 정도 업무만 하게 되지만, 정규 교과 수업이 끝나고 난 뒤 선생님들이 퇴근해야할 시간에 이루어지는 보충수업의 경우 시간표와 교사 관리를 담당하는 보충수업계 선생님은 1년 내내 바쁩니다. 그래서 저희 학교는 수업계 선생님은 한 분인데 보충수업계 선생님은 두 분입니다. 담임 교사가 학생 지도와 관련해서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부분은 아이들의 야간자율학습, 혹은 방과 후 학습 시간을 관리하는 분야입니다. 교육법에 명시돼 있지도 않고, 공식 교육과정과는 무관한 일에 제일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근대 교육이 다들 그러하겠지만, 한국에서 공식적 교육과정은 좌표로서, 준거로서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교육을 둘러싼 계급 계층적 요구, 다른 출구가 막혀버린 사회에서 유일하게 사회적 지위 배분 기제로 작동하는 교육의 규정적 성격, 학교에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군사문화의 잔재, 남성적인 이데올로기, 교사 집단의 안락주의와 소시민적 이기심, 아이들의 육체와 시간을 빠뜨림 없이 통제하는 빡빡한 일상, 풍요와 안락의 껍데기 속에서 갈수록 황폐해져가는 아이들의 내면세계, 이런 것들이 한국 교육에 더욱 근원적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 교육에서 제일 많이 이야기되는 것은 사교육, 입시제도 혹은 그 각론의 하나인 3불정책, 교원평가제, 논술 따위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교육과정의 끄트머리나 외곽에 있는 혹은 이 세상과 긴밀히 연관된 ‘교육 문제’들입니다.

저는 교사가 고민해야할 것은 교육 그 자체가 아니라, 교육이 잇닿아있는 이 ‘현실적 맥락’, 혹은 ‘확장된 현실’이며, 이들을 중심으로 제 수업과 학교 안팎의 활동을 재구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업 시간에도 전통적인 의미에서 국어 수업과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요소들, 이를테면 한미 FTA나 노동, 생태 문제 따위를 많이 이야기하게 됩니다. 굳이 국어교과라는 분과에 한정될 이유는 없으며,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현실’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구 온난화 문제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지금과 같은 추세로 온난화가 진행된다면 2100년도에는 지구 평균 기온이 5도 이상 상승할 것이라 합니다. 지금 세계에 기승을 부리는 온갖 기상 이변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지구온난화는 지구 평균기온이 0.7도 정도 상승한 결과라고 하지요. 만약 평균 기온이 5도 이상 상승한다면 불과 90년만에 이 세계는 어떻게 될까요. 교육이 미래를 염려하고 준비하는 것이라면,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지구온난화 문제에서 출발하여 너무나 자명하게 여기는 현대적 생활 양식, 이를테면 육식, 자동차, 아파트 같은 것들과 농업의 소멸을 당연시하는 근대적 사고 따위에 대해 아이들에게 의문부호를 던지는 것입니다.

또한, 한미 FTA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습니다. 차라리 지구 온난화 문제는 90년, 100년 뒤까지 고려하는 사고의 범위를 필요로 합니다. 일상인이 피부로 느끼기에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일어날 변화입니다. 2100년까지 지금 존재하는 생물종의 6-70%가 멸종하더라도 적응할 종은 또 거기에 맞춰 적응할 것이고, 먹이사슬 꼭대기에 있는 인간도 어찌됐건 거기에 걸맞는 사회적 진화를 하겠지요. 그 과정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한미 FTA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당장 한미 FTA가 체결되고 난 10년 뒤를 생각해 봅시다.

IMF 구제금융 사태를 겪은 지 10년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해있습니까. 그런데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추세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어떤 의미에서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완결시키는 것이 바로 이 한미 FTA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세계 자본주의 경제에 바탕 해 있는 대량 생산, 대량 소비, 대량 폐기의 시스템이 스스로도 자신을 감당할 수 없는 한계지점까지 치달아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교사는 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누구보다 깨어있어야 합니다. 싱어라는 재봉틀을 튼튼하게 잘 만드는 세계적인 회사가 있었는데, 결국 망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 회사가 재봉틀을 너무 튼튼하게 잘 만들어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는 검약과 절제라는 인간정신과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체제입니다. 끊임없이 낭비적인 소비와 탐욕을 부추기고, 이윤을 창출할 공간을 찾아 만만하고 약한 존재를 지칠 줄 모르고 공격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착취의 영구동력기관입니다. 이런 체제는 물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한미 FTA는 이러한 자본의 운동이, 미국 입장에서건 한국 입장에서건, 벽에 부닥쳤을 때 자신의 활로를 찾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윈-윈게임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자신보다 경쟁력 없는 한국의 산업이 될 테고, 한국 입장에서 보면 소수의 경쟁력 있는 산업을 제외한 나머지 산업(농업을 포함한)과 서민 대중 전체입니다. 한미 FTA는 이 모두를 사회적 보호망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약육강식의 싸움터 한가운데로 던져 넣는, 풀뿌리 민중에 대한 테러 행위에 다름 아닙니다.

이 역할을 한국에서는 민주화 세력 참칭하는 선출된 권력이 대행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미 FTA가 체결됐을 때, 서민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지, 최근 타결된 협상 내용이 정부의 사탕발림과는 달리 그 속에 어떤 문제점을 담고 있는지는 세세히 이야기 드릴 능력이 제겐 없습니다만, 그 대강의 의미는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5.
지금까지 저는 교육의 본질에 천착하고자 했던 한 국어교사의 자의식이 어떻게 한국적 현실이라는 맥락으로 옮겨왔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제 이야기를 슬슬 마무리지어야 할 때가 다가옵니다. 저는 국어교사란 언어에 민감한 존재라고 서두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국어교사는 교과서 속의 언어(말글)에, 국어 교과라는 한정된 분과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되리라 믿습니다.

후기 산업사회에서 특히 강력한 것이 바로 언어의 타락입니다. 허상의 언어가 실체를 대체하는 것입니다. 한미 FTA를 홍보하면서 정부는 항상 “모두가 경쟁력을 갖춰서 모두가 일류가 되는 공동번영의 사회로 나아가자”는 식의 주장을 되풀이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일류가 되었을 때 그때는 이미 일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일류가 되려면 그 밑에서 이류, 삼류로 버텨주는 다른 누군가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경쟁력, 일류라는 담론은 결국 불가능한 것에 대한 탐욕을 실현하기 위해 ‘가진 자’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그런 허상이 막강한 힘을 가진 실체로 살아 움직입니다. 그뿐 아니지요. 광고, 텔레비전 드라마, 오락 프로그램과 같은 대중매체의 언어들, 정치인들이 구사하는 언어는 얼마나 깊이 타락해 있습니까. 이런저런 것들의 영향 때문인지, 요즘 사람들이 향유하는 언어는 대개 자신의 생활의 실감에 바탕해 있다기보다 매체가 주억거리는 것들을 주워섬긴, 복제된 언어가 주종을 이룹니다.

저는 이 긴 글에서 결국 학교와 세상의 담장이 허물어진 세상에서 진정한 교육이 있어야 할 자리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민감한 교사라면, 자신이 서 있는 곳이 학교라는 교육공간이면서 또한 세상의 한가운데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교육의 영역이라면서 금 그어 놓고 그 안에서만 가르쳐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은 실로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결국 저는 지난 몇 년동안 교육을 교육답게, 언어를 가치로운 것으로 만드는 일은 세상이라는 넓은 광장에서 그 ‘현실적 맥락’과 분투하는 길 위에서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온 것입니다. 긴 시간 두서없는 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전남국어교사모임, ‘젊은 교사를 위한 연수’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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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내신을 옹호할 것인가  이계삼 07/06/20 513 
16   상처의 의미  이계삼 07/06/18 634 
15   달려라 애비 [1]  이계삼 07/06/18 549 
  국어교사로 살아가기  이계삼 07/06/18 566 
13   '그 대학'의 촌스러움  이계삼 07/03/21 676 
12   '혼란'을 위한 메모 [1]  이계삼 07/02/20 643 
11   "논술 파시즘" 앞에서  이계삼 07/01/30 507 
10   젊음과 늙음  이계삼 07/01/09 508 
9   우정을 위한 성찰 [1]  이계삼 06/12/11 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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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년전 파일을 정리하다가... [1]  이계삼 06/09/04 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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