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공명

(2007-03-21 23:33:09)
이계삼
'그 대학'의 촌스러움
그 대학은 구한말 민비의 측근이었던 보부상 출신의 거부가 세웠고, 일제시대 대표적인 친일자본가가 오랫동안 주인 노릇을 했다. 그 대학은 서북 출신의 고학생이 많아서인지 억센 반골 정서로 유명했다. 그 기풍은 면면히 이어져 세상이 어두움에 숨죽일 때는 돌쇠처럼 선봉에 서기도 했다. 그 대학은 ‘막걸리’로 상징되는 촌스러움과 투박함으로 사랑받았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고 대학 문화도 바뀌면서 그 대학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어(魚)씨 성을 가진 자칭 CEO 총장이 들어서면서부터는 아주 화끈하게 변신했다. 막걸리 냄새를 지워보려고 고급스런 포도주를 팔기도 했고, 종종 유명 오케스트라를 학교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 모아 캠퍼스 전체를 공사판으로 까뒤집더니 이내 으리번쩍한 건물들로 옷을 싹 갈아입었다. 더 나아가 그 대학은 '글로벌’을 외치며 모든 전공강의를 영어로 하겠다며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물론 그 사이 창피도 당했다. 한국 제1의 갑부에게 명예 철학박사 학위(왜 하필 ‘철학’이었을까)를 주려다가 ‘극소수’ 학생들이 소동을 피워서 난리가 났다. 그래서 그 분 맘 상하실까봐 총장과 보직교수들이 머리가 땅에 닿도록 빌더니, 이내 그 괘씸한 아이들을 학교에서 내쫓아버렸다.

그 대학은 몇년동안 수시모집에서 논술을 70%나 반영하면서 논술 사교육 시장에 바람을 빵빵하게 집어넣더니, 이제 와서는 논술이 변별력이 없다며 입을 싹 씻는다. 그 대학이 내놓은 2008년 입시안은 감동적이다. “내신 필요 없으니 수능 1등급만 받아오너라(수능 우선 선발제)”, “억울하면 강남으로 이사 오든지, 특목고 보내든지”(내신차등적용제,지역균형선발 폐지)”, 공부만 잘하면 되지 촌스럽게 무슨 봉사활동!(사회봉사전형제 폐지)”, “그대, 미국 살다 왔는가, 어서 오시게(글로벌 전형)” 등등. 그 사이 커트라인에도 자신감이 좀 생겼는지 합격안정권 점수까지 공개하겠다고 설치다가 ‘야, 그건 아니잖아’하는 안팎의 지청구에 밀려 그것만은 잠시 접었다.

그 대학의 욱일승천하는 기세를 지금 말릴 자가 없다. 그 옛날 막걸리 냄새 풀풀 풍기던 대학이 이제 새끈한 정장 뽑아 입고, 머리에 무쓰 발라 바짝 쳐올리고, ‘부자들의 SKY’ 앞에서 ‘기도’를 보겠다는데, 이제 어디 촌놈들이 얼씬하겠는가.

그 대학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이쪽저쪽 눈치보고, 이것저것 다 따지다가는 쪽박차기 딱 좋으니, 뭐든 화끈하게, 지~대로 하라”는 시대 정신을 지금 그 대학은 얼마나 멋지게 구현하고 있는가. 시대의 화두는 그야말로 ‘살아남기’ 아닌가.

이 글을 쓰는 지금 내가 근무하는 시골 고등학교에는 수백명의 ‘촌놈’들이 그래도 대학을 가보겠다고 환한 불빛 아래 숨죽이며 야자를 한다. 교육이 품고 있어야 할 정신적 기품을, 지성의 권위를, 대학의 공공적 역할을 앞장서서 땅에다 메다꽂는 그 대학의 촌스러움이 지금 하늘을 찌른다. (전교조신문 2007.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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