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공명

(2012-03-29 23:34:27)
이계삼
대장들
최홍재. 그는 내 대학 1학년 시절, 총학생회장이었다. 연설하다가 흥분하면 허공을 향해 장하게 목을 꺾고는 ‘청년 학도여~’ 라며 벼락처럼 울부짖었는데, 그 사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그는 이제 청년 극우파의 기수가 되어 이번 선거에 출마했다.

이인영, 우상호, 박용진 은 학교 다닐 때에도 대장이었고, 지금도 대장이다. 그들은 최홍재처럼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그 고무신으로 우리를 후려패지는 않았으나, 지난 십수년간 대장 노릇하면서 거둔 성적표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자 명단을 보면서 나는 옅은 탄식을 내질렀다. 정진후, 당선안정권이라는 4번을 꿰찬 전교조 위원장 출신의 교육운동가. 그가 전교조에서 수석부위원장, 위원장으로 대장 노릇하던 시절, 나는 전교조 일선 활동가로 살면서 일제고사든 학생 인권이든 아이들을 위해 나서 싸워야 하는 일에 대해 조합원들의 정서와 정권의 탄압을 운운하며 직접행동을 가라앉히는 것에만 골몰하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전교조 지도부를 보며 분노를 삼켜야 했다.

그는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보다는 조직이 조·중·동의 입길에 오르내리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20년 역사의 월간 <우리교육>이 졸지에 납품을 위해 연명하는 무가지로 전환되게 하는 일을 주도했고, 끝내 구조조정으로 모든 기자가 사표를 쓰고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침묵과 묵인으로써 방조했다. 대장의 역할은 그저 조직을 탈없이 굴려가는 것임을 그는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조직이 생기를 잃고 식물이 되어가든, 거기에 의탁된 아이들의 고통과 죽음이 어떻게 배반당하든, 상관없이.

손수조, 이 스물 일곱살 정치 신인은 자신의 오류와 말바꾸기를 들춰내는 이들을 ‘자객’이라 표현했다. 국회의장을 지낸 대선배가 위로해주고, 여왕께옵서 두 번이나 내려와 등을 토닥여주니 눈물이 났을 것이고, 그 뒤끝에 한마디 내뱉는다는 것이 불쑥 자객이라고 해버린 것일 게다.

그런데, 자신을 ‘꽃놀이패’로 지칭하는 당직자에게는 왜 분노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자의식이 없는 것일까. 그이도 고등학교 시절 대장이었고, 이제는 청년세대의 대장으로 거듭나려 하지만, 전세금 3천만원은 고사하고 한끼 3천원이 부담스러운 청년세대의 고통에 감정이입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서울에 일 보러 가면, 나는 친구들과 밤새 뒤풀이하고 첫 차를 타기 위해 영등포역으로 간다. 캔맥주를 하나 사서, 바닥에 신문을 깔고, 여섯시에 출발하는 무궁화를 탈 때까지 깜빡깜빡 졸며 시간을 보낸다. 담요를 둘둘 말고 코를 골며 잠든 노숙인들을 보며 나는 이 시대의 대장들을 생각한다.

누가 더 나은가. 대장은 대장 끈이 떨어지면 쓰러지듯, 노숙인은 알콜이 떨어지면 잠든다. 그들은 밤새도록 밑도 끝도 없이 떠들지만, 저 대장들이 내뱉는 언어들처럼 가식적이지는 않다. 그들에게는 시큼한 악취가 배어나오지만, 저 대장들이 내뿜어온 정치의 악취에 비할 바는 아니다.

수많은 대장들이 이번 선거에 출마했다. 그들을 대장으로 만들어준 시대적 열망들이 있었을 것이다. 시대는 그들 대장에게 지금껏 수없는 청구서를 들이밀었으나, 그들은 언제나 외상이었고, 지금도 지불유예 상태다. 그들은 영원히 외상을 갚지 않을 것이다.

저 대장들이 주름잡는 선거판 한 구석에 대장 아닌 이들이 분투하고 있다. 핵마피아들에게 선전포고한 열정적인 반핵운동가, 저 악한 자들을 빗자루로 쓸어서 종량제 봉투에 넣어 분리수거해 버리겠다는 당찬 청소노동자, 팔당 두물머리를 지키며 4대강 사업을 온몸으로 막아온 유기농업 농민이 바로 그들이다. 힘내라, 녹색당, 진보신당! 저 대장들의 생환과 몰락에 대해서는 나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한겨레 201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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