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공명

(2012-02-26 10:10:07)
이계삼
녹색당 창당에 즈음하여
드디어 3월 4일 녹색당이 창당한다. 서울, 경기, 부산, 대구, 충남에서 1,000명 이상의 발기인을 확보함으로써 그 까다로운 설립요건을 충족하게 된 것이다. 정의, 자유, 통합 따위 추상적인 가치가 아니라, 새누리 따위 유치찬란한 수사가 아니라, ‘녹색’이라는 분명한 이념적 지향을 가진 정당이 이제 등장하는 것이다.

강기갑,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처럼 보수정당의 정치인들과는 ‘끕’이 다른 뛰어난 실력과 헌신성을 갖춘 정치인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민주노동당은 늘 안타까웠다. 나까지 ‘종북’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이를테면 북이 핵실험을 성공했을 때 보여주는 태도는 크게 실망스러웠다. 어떤 이들은 미국에 맞서 핵실험까지 해 내는 ‘배포’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차베스가 훌륭한 지도자인지에 대해서는 꽤 복잡한 판단이 필요하겠지만, 비판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혼자서 라디오 앞에서 몇 시간씩 떠드는 그 이는 내 직관으로는 영 아닌 것 같다. 차베스의 영광도 러시아의 푸틴처럼 결국 ‘석유’의 힘일진대, 그런 차베스를 추어올리는 민주노동당의 논객들에게 서려있는 국가주의를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매우 의미있는 의제들, 이를테면 부유세 문제가 민주노동당 안에서 주저앉는 과정과 거기서 보여주는 이른바 자주파 인사들의 행태는 정말로 실망스러웠다.

그러다가 진보신당에 나도 합류를 했지만, 거기 당원게시판에 가끔 들어가면 나는 눈이 시려워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아이디, ‘도봉구에 사는 박아무개’ 같은 이들의 글들, 그런 류의 쌈마이들이 진보신당의 정서를 대변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진보신당이 논쟁과 싸움으로 지치고 시들어갔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결국은 ‘자기 살 길을 찾아’ 떠나버린 정당이 되어버렸을 때, 진보신당에 잔류한 몇몇 존경하는 분들의 좌절도 안타까웠다. 그래서 나는 최근까지도 진보신당 당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분명한 입장이 있다. 오늘날,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를, 이 체제가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를 묻지 않는 정치란 결국 허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정권교체에 사활을 거는 이들에게, 안철수가 혹은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과연 무엇이 달라질 것인지를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복지에 모두 사활을 거는 이들에게 복지에 쓸 ‘돈’이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핵’으로부터 빠져나올 길을 과연 저 정치인들은 준비하고 있는지, ‘핵마피아’와 맞서 싸울 의지는 있는지를 또한 물어야 한다. 농업이 회생할 수 있는 첫 삽을 저들은 뜰 수 있을 것인지, 금융경제의 몰락과 시시각각 다가오는 공황의 가능성을 막아낼 풀뿌리 공동체를 만들어낼 비전을 저들은 갖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박근혜의 남부권 신공항에 맞서 문재인과 문성근은 부산권 신공항을 이야기할 것이다. 올해의 양대 선거는 결국 개발 대 개발, 경제성장 대 경제성장, 복지 대 복지의 대결일 뿐이다. 노회찬의 표현처럼 불판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제 그 불판의 색깔도 바뀌어야 한다.

단언컨대 이 시대의 색깔은 녹색이라고 나는 믿는다. 엘리트가 아니라 풀뿌리이며, 중앙집중이 아니라 탈중심이며, 산업주의가 아니라 농본주의이며, 남성적 거대서사가 아니라 여성적 모성의 힘이며, 다수결의 힘의 논리가 아니라 제비뽑기의 우연과 순환이다. 이들만이 이 세상을, 우리 삶의 변화를 기약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녹색당 창당을 앞두고 스쳐가는 인상적인 기억이 있다. 그것은 지난 2월 1일, 우리 지역에서 한전의 폭력적인 송전탑 공사 강행에 분신자결로 저항하신 이치우 어르신 대책위원회가 출범하던 날의 일이다.

우리 대책위는 정치권에게 도움을 청했고, 고맙게도 권영길·강기갑·조경태 의원이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녹색당 창준위와 여러 환경단체에 도움을 청했는데, 녹색당 하승수 창준위 사무처장이 그날 끝까지 함께 해 주었다. 밀양시내 제일 중심부에 있는 옛 관아 자리에서 집회를 하는데, 맨 앞줄에 국회의원 세 분과 상임고문 문규현 신부님, 하승수 변호사를 위해서 자리랍시고 만들어두었다.

그런데, 지역 정객이라는 작자들이 그 자리를 먼저 꿰차고 앉는 바람에 문규현 신부님과 하승수 변호사는 그 자리에 앉지 못하고 문규현 신부님은 시골 어르신들 속에, 하승수 변호사님은 연단 옆에 서서 집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언론사들의 카메라 플래쉬는 결국 맨 앞줄의 세 분 국회의원과 지역의 정객들에 집중되었고.

그런데, 트럭 위에 마련된 연단으로 올라가던 한 연사가 디딤판격으로 갖다 둔 플라스틱 의자가 미끄러지면서 넘어지는 일이 생겼다. 그 다음 번 발언은 주민들의 증언이었는데, 이치우 열사의 동생 이상우 어르신들이 올라갈 차례가 되니, 녹색당 하승수 변호사가 재빨리 그 어르신이 올라갈 때 의자를 밑에서 붙잡아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상우 어르신은 미끄러지지 않고 연단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집회가 끝날 때까지 다른 연사들에게도 그렇게 하신 것 같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게는 뭉클한 감동 같은 것이 있었다. 굳이 카메라 플래쉬가 터지는 자리를 고집하지 않는 겸손함 말고도, 미끄러운 플라스틱 의자를 붙잡아 어르신들을 연단 위로 올려드리는 그 모습에서 나는 녹색당이 앞으로 이런 정당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혼자 뭉클한 상상을 했다.

힘없고 약한 이들을 떠받들어주는 정당, 가장 가슴 아픈 일들이 벌어지는 곳에는 늘 곁에 함께 하는 정당, 권력 쟁취가 아니라 협동과 희생으로 이 세상을 붙들어 주는 정당, 그런 녹색당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 녹색당이 드디어 출범한다!!(수유너머 위클리, 201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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