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공명

(2013-07-26 19:44:15)
이계삼
나는 군대가 싫다
2008년이었던가, <로이터> 통신이 선정한 ‘올해의 이미지’에 퇴역한 해병들이 운영하는 ‘청룡 극기 캠프’에 참가한 초등학생 아이들 사진이 선정됐다. 열살이 갓 지났을까, 진흙 범벅의 꼬마 아이들이 잿빛 군복을 입고 애처롭게 봉체조를 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 괴로웠다.

나는 이런 프로그램을 보면서 견딜 수 없는 뒤틀림을 느꼈지만, 텔레비전에 심심찮게 등장하던 이런 종류의 청소년 극기 캠프 장면은 언제나 아이들에게 전에 맛볼 수 없었던 ‘야성의 깨달음’을 일깨워주었다는, 배움과 성장의 서사로 분칠되었다.

교관은 기진맥진한 아이들에게 묻는다. “잘할 수 있습니까?” 텔레비전을 보는 내가 중얼거린다. 모든 걸 다 빼앗아 놓고, 대체 뭘 잘하라는 말인가? 안경 렌즈에 흙탕물이 잔뜩 튄 해사한 여자아이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열심히 하겠슴다”를 복창한다. 뭘, 더, 어떻게 열심히 해야 된다는 말인가?

간악한 복종의 요구와 지향 없는 맹목의 다짐, 아이들에게 그나마 남아 있을 자연의 선함 마지막 한방울까지 쥐어짜 ‘군기’라는 맷돌에 갈아 분쇄시켜 끝내 주저앉히는 이 잔인한 제의가 온 나라에서 그렇게 ‘성업’중이라니. 여기에 아이들을 밀어넣으라고 채근하는 교육청, 이따위 프로그램이 갖는 교육적 의미에 대하여 눈곱만큼도 성찰하지 않고 순순히 따르는 학교, 그 틈바구니에서 돈 좀 벌어보겠다고 꼬여든 장사치들, 공주의 다섯 아이들은 이들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무자격 업체, 무자격 교관들이 운영한 ‘짝퉁 해병대 캠프’라고 떠들고들 있다. 그렇다면 ‘원조 진짜배기 해병대 캠프’가 이런 따위 프로그램을 돌려야 한다는 말인가? 극기 정신과 협동심을 배양한다고? 솔직히 말하자. 그저, 말 안 듣고, 게으르고, 나약한 ‘요즘 아이들’, 맛 좀 보여주겠다는 수작 아닌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짧은 대학생활을 맛본 적지 않은 남자아이들은 군대를 가고 싶어했다. 대학이 자신의 삶에 아무런 희망도, 의미로운 존재도 될 수 없음을 깨달은 아이들은 두려워졌고, 이런 상태로는 이 냉혹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불안이 엄습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선택한 자기단련의 공간은 군대였다. 그러나 아이들이 정말로 군대를 선택한 것인가? 이 체제가 아이들을 군대로 떠민 것이다.

빠릿빠릿해야 한다, 위아래 잘 살피며 눈치 있게 처신해야 한다, 상처는 드러내지 말고 홀로 견뎌야 한다, 군대의 교육학은 대략 이런 얼개를 갖고 있다. 어설픔, 눈치 없는 주견머리, 상처와 나약함들은 쓸어내고 꺾어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약함’이자 우리들 인간성의 소중한 한 원천이다.

어설픔이 용인되는 인간관계, 나약함을 감추지 않아도 되는 공간, 상처를 함께 견뎌가는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한다. 강하고 빠릿빠릿한 자들의 세계가 그렇게 그리운가? 그곳은 폭력이 대수롭지 않게 자행되는 곳, 공허한 내면 속에는 생존 본능만 남아 있는 가련한 좀비들의 군락지가 아닐 것인가?

훈련병 시절, 교관에게 전해들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철모에 위장포를 씌운 뒤 대검을 들고 숲으로 들어가 10분 안에 위장을 완성해서 집결하는 훈련이 있었다. 다들 시퍼런 잡풀들을 꺾어 위장포에 꽂은 채 되돌아왔는데, 한 훈련병이 진달래, 개나리, 철쭉을 한아름 꺾어 둥근 철모를 꽃밭으로 수놓은 채 되돌아왔다는, 어느 전설적인 ‘고문관’의 이야기였다.

신병교육장을 뒤집어놓은, 군대의 교육학에 천진한 테러를 가한 어느 ‘고문관’의 ‘거룩한 바보짓’을 생각하다 나는 살해당한 다섯 아이들의 운명을 생각하며 괴로워진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한겨레 2013.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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