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공명

(2013-07-26 19:42:43)
이계삼
공부는 힘이 세다
작년 봄 나는 핵발전소의 피폭 노동에 관한 르포를 쓰기 위해 발전소 격납 건물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어렵사리 만난 적이 있다. 예상대로 이야기를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고, 피폭 노동의 위험에 대해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다.

피폭 노동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그것을 부정하는 대화의 패턴이 반복되는 도중에 문득 ‘지금 내가 저 사람에게 대단히 고약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를 접은 나는 그와 함께 횟집으로 가서 소주를 마셨다.

소주가 여러 순배를 돌고 자리가 조금씩 깊어가던 무렵, 그가 소주병이 쓰러지듯 고개를 꺾으며 뇌까린 이야기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요, 방사능 … 잘 모르겠어요. 안전하다고 생각해요. … 그렇지만요, 2년 계약이 끝나가면요, 피가 마르는 것 같아요.” 소주를 한잔 더 털어 넣은 그는 말했다. “후배들에게 꼭 이야기해주고 싶은 게 있어요. 니들은, 제발 공부 더 열심히 해서, 나처럼 하청 들어오지 말고, 한수원으로 들어오라”고. 이야기 끝에 그가 살짝 눈물을 비친 것 같기도 하다.

그가 속한 회사는 2년 단위로 한수원과 계약을 해야 하고, 따라서 그는 회사가 재계약에 실패하면 실직을 걱정해야 하는, 사실상 비정규직이었다. 핵발전소 안에서 원자로 정비와 제염 작업 같은 피폭 노동은 한수원이 아니라 하청업체 직원들의 몫이었다.

밀양 송전탑 싸움에서 공사용 헬기가 뜨지 못하도록 막았던 주민들이 업무방해 혐의로 고발당해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젊은 검사는 50대 아주머니에게 호통을 쳤다. 말끝에 그는 “자식한테 부끄럽지도 않냐”고까지 했다. 아주머니는 검사실을 나오자마자 너무나도 서러워서 기다리던 이웃들 앞에서 엉엉 울었다.

그 검사와는 나도 안면이 있다. 내가 학교에 있을 때, 수능이 끝난 고3 아이들을 위한 강연자로 그가 우리 학교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는 강연 도입부의 상당 부분을 자기소개에 할애했다. 그는 자신이 서울의 명문 대학을 나왔고, 아내도 검사이며, 어떻게 공부해서 언제 고시에 합격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가 피의사실과 상관없는, 듣는 이에겐 인격적 모욕으로 들릴 수도 있을 호통을 칠 수 있었던 자신감은 아마도 그가 공부를 잘해서 고시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부여해준 것이리라.

지금 밀양 송전탑 싸움은 전문가협의체의 판단에 운명을 걸고 있다. 한국전력이 추천한 위원 세 사람은 모두 서울대를 나와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해당 분야 최고의 스펙을 갖춘 전문가들이다.

그러나 지난 2일 그들이 제출한 보고서 초안은 주민 쪽 위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도리코 찜쪄먹을’ 정도로 한국전력의 자료를 그대로 베껴 쓰고 있었다. 국회가 위임해준 전문가적 검증은 없었다. 8년의 싸움 끝에 처음으로, 한국전력이 아닌 외부 전문가들의 객관적 시선으로 검증을 받아보고자 했던, 그러므로 이를 통하여 실낱같은 대타협의 여지를 찾아볼 것을 간곡하게 기대했던 나는 그 보고서를 보면서 무릎이 풀썩 꺾이는 좌절을 느꼈다.

공부를 잘하면 한수원 직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자기보다 공부 못했던 하청 직원들에게 피폭 노동을 맡길 수 있다. ‘컨트롤 C에서 컨트롤 V’로 끝나는 보고서에 밀양 주민들의 생존권을 빼앗을 법적 권능을 부여해 주는 것도 바로 서울대와 미국 박사의 스펙이 엮어낸 전문가의 자격이다.

나는 지금껏 돈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실감을 갖고 살았다. 그러나 돈이 인간의 영혼을 주장하지는 못하리라는 믿음 또한 갖고 있었다. 나는 학교를 그만둔 지난 2년 사이 공부가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는 실감을 얻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공부가 인간의 영혼마저 주장하고 있다는 믿음을 얻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돈보다 공부가 더 힘이 세다. (한겨레 201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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