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공명

(2013-07-26 19:39:22)
이계삼
명불허전, 조선일보
나는 어린 시절, 집안을 굴러다니던 <조선일보>를 읽으며 한자의 오묘함을 깨쳤다. 사춘기 시절에는 동네 이발소에 머리를 깎으러 갔다가 <월간조선>을 몇 권씩 빌려와 통독하면서 세상사에 관한 잡박한 지식과 속물스러운 인생관을 얻었다. 그러나, 나는 <조선일보>가 내 삶에 끼친 영향에 대해 그리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동네에서 신문을 받아보는 몇 안 되는 집이었던지라 초졸 학력이 전부였던 아버지는 그 현격한 ‘정보비대칭’ 상황을 이용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정치평론가 겸 지식인 노릇을 하실 수 있었다. 막걸리마당 언저리에서 내가 어깨너머로 주워들었던 마을 어른들의 열띤 정치토론들, 이를테면 ‘영쉐미와 김대주(중)이’의 애증과 대결의 드라마는 언제나 흥미진진했고, 나는 그 열띤 자리가 <조선일보>가 제공한 ‘아고라’의 한 구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내가 변한건지, <조선일보>가 변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이 나는 <조선일보>를 사회적 ‘흉기’로 여기게 되었다. 다만, <조선일보>와 엮이는 일이 없기를 바랄 따름이었는데, 이제 내게도 차례가 돌아오고 말았다.

지난 5월 1일자 <조선일보>는 ‘밀양 송전탑’ 사태를 크게 보도했다. 그 기사를 읽고 난 뒤, 내 몸을 훑고 간 저릿한 느낌은 지난 시절 <조선일보>로 생겨난 고통들에 잠시나마 잇닿은, 짧은 감전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 전날, <조선일보> 권아무개 기자가 반대 대책위 사무국장인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응대할 시간도 없었고, 필요도 느끼지 못한 나는 상세한 최근 동향과 주민들의 입장이 정리된 보도 자료를 메일로 전해주었다. 그러나, 다음날 <조선일보>의 밀양 송전탑 관련 기사는 극소수 찬성파와 한전의 입장으로 사실상 도배되어 있었다. 나는 권아무개 기자에게 항의했지만, 자신은 기사를 작성하지 않았고, 우리 측 보도자료를 정리해서 올렸을 뿐이라고 답했다. (1단계 책임면탈).

그 기사대로라면 전체 1,484세대 중 한전의 13개 보상안을 거부한 1,813명은 “일부 주민”일 뿐이며, 어르신들을 돕고 있는 신부님과 우리 일꾼들은 소수 반대파 주민들과 결합하여 사태 해결을 어렵게 만든, “이상한 사람들”이다. 작년 1월 자결한 이치우 어르신은 “자기 농경지가 송전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보상금을 못 받는다”며 농성하다 사망한 경우가 된다. (2단계 사실왜곡).

우리는 신고리핵발전소 3~4호기 전력을 건설 중인 인근 간선구간과 연결하여 먼저 유통시킬 것을 요구했는데, 기사는 “동시정전”으로 어렵다는 산업부 관계자의 동문서답 같은 답변을 인용하며 ‘백지화와 다름없는 주장’이라고 비약해버린다. 기사를 작성한 조아무개 기자에게 항의하니 ‘기사 축약단계에서 발생한 맥락의 실수’였다고 말한다. (3단계 실수를 빙자한 비약과 일반화).

이제 사설은 주민들을 향해 ‘신도시를 지나는 곳에서도 동의했으니, 전기를 공공재라는 인식을 갖고 풀어달라’고 주문한다. ‘신도시도 찬성하는데, 촌놈들이 감히?’ 이런 뉘앙스가 깔려 있다. (4단계 훈계). 기사의 현저한 편향성으로 잠시간 입씨름이 있었다. 기자의 결론은 “(그러니) 우리 전화 잘 받아주세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화에 제대로 응대하지 않은 내가 그 책임을 지게 되었다. (5단계 떠넘기기). <조선일보>의 왜곡보도 5단계 패턴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명불허전(名不虛傳), 그 명성 그대로였다.

막상 겪어보니 <조선일보> 참 별것 아니구나, 싶다. ‘흉기’는 녹슨 ‘부엌칼’처럼 초라했다. 의연하고 당당하게, 또박또박 대응하면 될 것이다. 녹슨 '부엌칼'을 '흉기' 대접해 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전화는 충실히 받아주고. (한겨레 20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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