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공명

(2013-07-26 19:37:44)
이계삼
기차 안에서 중얼거리다
“너, 사회생활 그 따위로 할 거야?” 씹어 뱉듯 내던지는 목소리에 나는 놀라 뒤돌아보았다. 서울에서 밀양으로 내려오는 케이티엑스 열차 안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눈에 보기에도 파리한 낯빛의 50대 여성이었다. 그 옆자리, 남편인 듯 보이는 남성은 망연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인은 자신의 회사 직원을 나무라던 중이었다. “내가 오늘 서울에 진단받으러 간 줄 알면, 우리 공장이 오늘 어떻게 돌아갔고, 무슨 일이 있었고, 시간 봐서 보고하는 게 예의 아냐? 사회생활 그 따위로 할 거야?”

다시, 다른 직원에게 전화를 건 그는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한 달 뒤에 수술받기로 했다. 이번 주, 월급날 들어있지? … 응 … 응. 유방암이래. 두 달 정도 못나갈 거야….”

뜻하게 않게 나는 한 여인의 고통에 찬 드라마를 엿듣게 되었다. 그렇게 몇군데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리던 여인은 어느새 조용해졌다. 힐끔힐끔 뒤돌아볼 때마다 그와 남편은 망연히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밀양에서 내가 내릴 때까지 그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누구에게든, 이런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얼씬거리는 죽음의 그림자를 의식하며,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터널의 입구에 서 있는 자신을 만나는 순간이. 평범한 일상의 새삼스러운 살가움과 다가올 고통에 대한 공포로 몸서리쳐지는 어떤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우리네 인생이란 결국 고통 앞에서만 진실해질 것이다. ‘끝’이 있다는 것, 이건희와 전두환과 내가 유일하게 공유하는 평등한 삶의 조건이란 ‘죽음’밖에 없다는 것,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이 절대적 조건 앞에서만 우리는 깨달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난 주 어느 귀농교육 프로그램에서 강의할 일이 있었다. 그날 내게 주어진 주제는 ‘대안 사회의 모습’이었고, 강의 끝무렵에 나는 밀양 송전탑 이야기를 꺼내며 관련 영상을 함께 볼 것을 제안했다. 뜻하지 않게 몇 가지 반응들에 마주쳤다. “지역 이기주의다, 그 노인네들 전기 쓰면 안 된다.” 좌중 전체의 분위기라기보다는 몇 사람의 돌출적인 반응이었지만, 나는 적이 당황스러웠다. 나는 오기가 발동했고, 영상을 틀었다. 한 사람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물론 나는 이런 반응이 밀양송전탑 투쟁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일반적인 반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미학자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의 교육>에서 갈파하듯, 이것이 ‘소심하고, 겁먹고, 혼란에 빠진’ 오늘날 대중의 한 모습임은 분명해보였다. 아도르노는 이것을 ‘볼거리와 오락만을 제공하는 미디어’와 ‘개인적 양심의 능력을 키우지 않는 교육제도’에 연관지을 것이다.

맞을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네 삶은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총력전이 되어 있다. 오늘날 세계는 열차 안의 그 여인처럼 몸속에 뿌리내린 암종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인간은 또한 영물인지라 직관적으로는 깨닫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가 뭔가 깊은 곳에서부터 뒤틀려 있으며, 이 세계에 넘쳐나는 고통의 신음이 거기서 유래하는 것임을.

내가 가진 희망이란, 그것이 바로 자신의 문제가 되었을 때, 본능적으로 튕겨져오르는 신경질이 잦아든 뒤에 찾아올, 말문을 닫고 망연히 허공을 응시하는, 어떤 고독한 순간이다. ‘끝’이 있다는 것, ‘어찌할 수 없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때서야 우리는 무력하게 굴종했던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이며, 타인의 고통에 감정이입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모든 것이 너무 늦지 않기를…. 그때, 우리 앞에 최소한의 사회적 정의라도 살아남아 있기를, 핵과 송전탑에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영토가 남아 있기를….(한겨레 2013.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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