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공명

(2013-02-07 15:52:05)
이계삼
세 자매 이야기
공선옥 작가의 <그것은 인생>이라는 단편이 있다. 어머니는 집을 나가고, 알콜중독인 아버지는 ‘내가 없어야 니들이 산다’는 편지를 남기고 역시 집을 나간다. 전기도 수도도 끊어진 영구임대아파트에서 밤이면 창문에 비치는 불빛으로 사물을 분간하며 살아가는,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남매. 오빠는 동생을 위해 소매치기를 결행한다. ‘그것은 인생’이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그 시간, 오빠를 기다리던 동생은 가스가 샌 지도 모르고 촛불을 붙이다 폭발을 일으킨다. 아마도 동생은 죽었을 것이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내가 무슨 사건을 들먹이려는지 눈치 챘을 것이다. 얼마 전, 경기도 고양에서 영양실조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세 자매 이야기. 잠깐 동안이겠지만, 온정이 줄을 이었다 한다. 어느 시민은 익명으로 쌀 50포를 기부하면서 편지를 보냈고, 고양시장은 트위터에 ‘그 편지를 읽으며 코끝이 찡해졌’노라면서 ‘목민관이 힘써 일해야 하는 이유를 느낀다’고 썼다. 시장님은 그 편지가 링크된 트위터 멘션을 한 번만 리트윗 해달라는 알뜰한 주문도 잊지 않았다.

사건은 이런 식으로 소비되어지고, 끝내 잊혀질 것이다. 목민관의 책임감을 말하는 민선 시장도, 단신으로만 흘려보내는 언론인들도, 이런 일에는 진력이 난 듯 무심한 공화국의 시민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멀쩡한 보호자가 존재하지만, 오직 그 보호자들의 부재와 무관심 때문에 세 자매가 아사 직전에까지 이른, 이 가공할 사태는 기실 목민관의 책임감으로도, 리트윗으로도, 그 어떤 제도와 기구의 노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가공할 하나의 징후라는 사실을. ‘가족’이라는 보호막, ‘현금’이라는 수단, 우리 삶을 지탱하는 이 두 가닥의 동앗줄이 끊어져버린다면, 오늘날 그 어떤 아이든 곧장 세 자매의 상황으로 내던져져버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남매의 오빠는 소매치기를 해서 ‘현실의 자본’을 구하려 했다. 고양의 세 자매는 전단지와 우편물 겉봉을 모아 연습장을 만들어서는 그 처참한 상황에서도 공부를 했다. 그리고, 검정고시를 통과하여 학력이라는 ‘상징 자본’을 구하려 했다. 오늘날 부모들이 그토록 고되게 일하고, 자녀들을 그토록 가혹하게 공부시키는 것도 자신들이 혹여 부재했을 때, ‘가족’이라는 동앗줄이 뜻하지 않게 끊어지게 되었을 때, 자녀들에게 물려줄 그나마의 ‘현실의 자본’을 위해서, 자녀들이 학력이라는 ‘상징 자본’으로 그럭저럭 자립하게 하려는 필사의 노력이 아닌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이 사건을 두고 한번이라도 자신들의 복지 공약의 빈자리를 검토해 보고, 지자체와 학교와 연계하는 청소년 복지의 틀을 구상하기 위한 노력을 했는지, 아무도 모르고, 알려진 바 없다. 제도와 기구가 작동을 멈추는 자리, 제도와 기구에게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는 자리, 그 누구도 답을 말하지 못하는 자리, 세 자매 이야기는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다. ‘사각지대’로 명명되는 그 빈공간은 제도와 기구를 지탱하는 물적 토대가 갈수록 허약해질 이 ‘저성장 탈성장의 시대’에 더욱 넓어질 것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만큼은 ‘마을을 살려야 한다, 증여와 대면접촉의 인간관계를 넓혀야 한다’는 대안 담론을 건드리고 싶지 않다. 세 자매가 영양실조가 아니라 실제로 굶어죽었을지라도 기실 우리는 별 다른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참담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정치인들에게는 목민관이 어떻고 하는 식의 쓸데없는 허장성세를 떨지 말자고 권유하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들 시민들이 이 제도와 기구들의 무기력과 무용함을, 오늘날 우리들의 이 위태로운 삶을 한 번 정직하게 응시해 보자고 말하고 싶었다.(한겨레 20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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