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공명

(2012-12-27 18:41:12)
이계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상'이다.
민주주의(Democracy)를 이제 어떻게 ‘인민(demos)의 지배(cratia)’라고 번역할 수 있겠는가. 만주국의 설계자인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 아베가 일본 수상으로 등극했다. 그 만주국 장교로 독립군을 토벌하고, 이 나라를 18년간 만주국 비슷하게 다스렸던 ‘그분’의 딸이 5년간 이 나라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의 곁에는 정주영의 막내아들이 있고, ‘사꾸라 정당’이라 수군거렸던 민한당 총재의 아들이 비서실장이 되어 있다. 정치란 저런 자들이 하는 것이다. 그러니 5년에 딱 하루 투표소에서 행사하는 권리, ‘인민의 주권’이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12월 20일, 간밤의 폭음으로 하루 쉬는 고소득 전문직의 문재인 지지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엄동의 새벽에 공구가방을 메고 인력시장으로 나가는 박근혜 지지자가 또한 있었을 것이다. 가난한 이들은 왜 부자 정당에 투표할까. ‘그분’의 딸이라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보여준 게 없는, 자취하는 대학생만큼도 세상 물정을 모르고, 어떤 질문이든 더듬거리고 버벅대는 이에게 왜 과반을 훌쩍 넘는 표를 몰아다 줄까.

그들은 이성과 논리가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 똑똑한 ‘리버럴’ 정치 엘리트, 나꼼수, 환호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딱히 대거리할 능력은 없지만, 우리가 산전수전 다 겪어본 바로는 독재가 더 낫더라, 그렇게 여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10년동안 겪어보지 않았나. 민주주의가 밥을 멕여주던가. 그래봤자 저들도 가진 자들의 편이기는 매한가지, 그나마 우리를 이 정도로라도 먹고 살게 해 준 ‘그분’과 재벌의 정당이 다가올 두려운 변화 앞에서 차라리 믿음직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선거는 경제적 공황 상태에서 벌어질 생존 경쟁을 예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강자에 대한 선망, 전체주의적 질서에 대한 동경, 공공적 대의보다는 개체적 안정에 대한 강력한 열망이 분출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선거의 뒤끝에서 노동자들이 목숨을 끊고 있다. 이를테면 고공 농성 이후 끌려 내려오다 폭행당한 뒤 우울증과 신경쇠약으로 고통받아온 현대중공업 사내 하청 노동자 이운남, 이런 이들이 어떤 예감의 공기를 느낀 듯 허공에 몸을 던진다.

선거가 끝난 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가톨릭 영성가 토마스 머튼의 글 ‘사막 교부 금언집 서문’을 거듭 읽곤 했다. AD 4세기경,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공인되었을 때 한 무리의 수도승들은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사막으로 떠났다. 국교가 된 그리스도교를 통하여 영혼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체제의 바깥으로 스스로 떠나온 이들은 돗자리나 가방을 짜 내다 팔며, 침묵과 관상으로 조용히 살았다. 그들에게 사회란 ‘난파당한 배’와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허우적거리는 존재일 뿐, 같이 허우적거리는 이웃들을 구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먼저 자신을 건져올림으로써 세상의 구원을 도우려 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우리도 그들처럼 사막으로 떠나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저렇게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사상이 필요하다. 약자들의 단결의 방법으로써, 자립과 자치의 사상이. 자본주의가 지금 저물고 있다면, 우리는 저 노동자들, 약한 이들과 더불어 다른 세상을 지금 여기서, 그것이 아주 작은 공간일지라도, 만들어야 하리라.

농업과 육체 노동, 적정 기술, 시골 살이, 대안 화폐와 협동조합, 머릿속을 떠다니는 몇 가지 단어들을 끄집어내본다. 아아, 정말이지 나는 5년 뒤에 다시 저 ‘리버럴’ 정치 엘리트들에게 투표하고 싶지 않다. 필요한 것은, 나 하나부터 땅을 짚는 일, 허우적거리는 이들을 건져 올릴 ‘사상’이다.(한겨레 2012.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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