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공명




(2014-12-07 11:32:48)
초록
지율스님의 생태운동과 에코페미니즘

지난 월요일 다녀가신 조은수 교수님이 쓰신 논문 한편을 올려봅니다. 제게 보내신 지는 조금 되었는데 제가 열어보지 않았던 글이기도 합니다. 제가 걸어 온 시간들을 누군가는 밖에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옮겨봅니다. 물론 글에는 제 분노나 노심초사, 긴장, 애증 같은 감정은  배제되어 있습니다. 혼자만의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밖에서는 모르겠지요.....


지율스님의  생태운동과  에코페미니즘
                                                                                   -      서울대학교 조  은  수

I. 여는  말 - 우리는  왜  지금  다시  지율  스님을 생각하는가

지율스님이  천성산  보존을  외치는  단식투쟁에  들어가고  전국에  찬반  격론이  벌어진  후  벌써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우리는  왜  지금  다시  지율스님을  다시  돌아보는가.  한국  사회에  그때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진정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반성  때문이다. 지율스님이  남긴  유산은  빚이  되어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굳이  외면했다.  새로운  개발  사업이  제안되고,  반대 논란이  일고,  예전의  역사를  다시  짚어보고  회상하지만,  결국  우리들은  개발을  통해  단축된  시간과  증가된  부와  정돈된  주변은  삶의  질을  높이고  삶의  여유와  여가를  위해  쓸  수  있다는  그  논리에  설득당하여,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그  대열  속에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참가자가  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쉼은  없었다.  하나의  사건을  잊어버릴  때쯤이면  새로운  환경  재난이  닥쳤다.  반복되는  사건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근본을  깊이  들여다보고  사유하기  보다는  분노와  개탄의  감정만  소비하여 왔다.  그가 2009년  여름  낙동강에서  우리를  데리고  다니면서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켜  보여주고  사진을  찍어서  눈앞에  가져다주었어도 우리는  그것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구제역  파동이 일어났다.  일본에  쓰나미가  일고  핵발전소가  붕괴되는  사태가  바로 목전에서  일어나듯  중계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정말  다급해  졌다.  비가  올  때마다  바람이  불때마다  우리는  방사능  피해에  전전긍긍한다.  이제  맹독극물이  담긴  드럼통이  땅  속에  묻혀서  그  쇠가  녹고 화학물질이  흘러나와  땅으로  스며들고  물에  녹고  있다고  한다.  그  물을  인간과  축생,  풀과  나무가  그  마실  것이다.  나와  남,  그리고  나와 환경의  구분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세계적  환경위기는  더  이상  학자들의  논란의  장에  머무를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도,  이러한  문제의 현재성과  다급함  때문이다.

그때  마다  우리는 2001년을  회상하게  되고  만일  그런  상황이  다시 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 만일  우리가  그때  다른  결정을  하였다면, 우리가  그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나갔다면,  십년  후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떠할까,  하는  생각을  또한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그의 생명운동은  과거의  일이지만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짐으로  남아서  풀리지  않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다.

환경과  생태  문제에  대한  이론의  가치는  그것의  실천적  전망  속에서  구체화되었을  때  그제서야  이론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지율스님의  생명주의와  그  실천은  불교적  이념이  환경적  가치  실현에  얼마나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의  하나의  경우를  보여준다.  흔히  그가 불교  승려이고  또한  여성이라는  점에서  그의  생태관은  당연히  불교나 여성주의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에 대한  연구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본  논문은  지율스님의  글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그의  생태관을  분석함으로써 ‘불교’, 그리고 ‘여성’이  실로  그의  생태  사상의  두  가지  주요  키워드가  됨을  보이고자  한다.

II. 배경 - 생명의  자각과  실천

최근  오십년간  유례없는  산업화와  고도성장을  이룬  한국  사회에서, 그동안의  개발  사업이  환경에  어떠한  영향을  가져올지는  이미  예견되는  바이었다.  하지만  환경을  둘러싼  논란이  본격적인  공공의  사회적 담론으로  나타난  첫  케이스로는  새만금  개발  반대  운동과  지율스님의 천성산  살리기  운동을  들어야  할  것이다.  지율스님의  천성산  개발  반대  운동은  생태계  보존의  중요성과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깊은  자각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정부에서  천성산  밑에 13킬로미터에  달하는 터널을  건설한다면  천성산  주위의  동  식물,  자연  환경을  파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단식  등의  육체적  투쟁,  그리고  도롱뇽을  원고로  하는 '자연의  권리'  소송 등 법률적으로 투쟁하였다.  한편  그의  주장은 국토  개발이  가져오는  환경훼손의  사회적  비용과  경제적  손익  문제에 대해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오랜  논란  끝에  터널은  완공되어 서울  부산을  두  시간에  잇는  고속  철도는  개통되었다.  그러나  환경 훼손을  감수하고  진행하는  개발의  문제점을  사회  전반에  환기시킨  그의  공적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환경운동사는  지율 이전과  지율  이전으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생명운동은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였다.  지율  스님은 2001년  당시  내원사 선방에서  살고  있었다. 1992년  비구니가  된  이래  그는 94년부터  선방을  다니면서  참선  수행에만  전념하고  있었고  당시  산을  지키는 ‘산감’의  소임을  맡고  있었다.  어느 4월,  그는  포크레인이  산  정상에  올라오는  것과  맞닥뜨렸다.  나무가  베어지고  땅을  파헤쳐지면서  깊은 산  산새들이  날아갈  때  그는  산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왠지  까닭  없이  눈물이  흘렀고   그  눈물은  좀체  그치지  않았다. 그  소리에  대고  그는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절의  어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산을  떠나서  부산  시청  앞에서  일인  피켓  농성을  시작하고  연좌  농성에  들어갔다.  터널이  뚫리면  늪과 계곡의  지하수가  고갈되고  진동과  전자파로  인하여  그  주위의  생태계가  파괴될  것이라는  내용을  주위에  알렸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했지만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그는  터널로  인하여  사라져  버릴 위기에  있는  많은  생물들을  대표하여  도롱뇽을  원고로  하는  그  유명한  소송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시위,  단식을  하고,  삼보일배로 수백  킬로를  걸었다.  정부나  건설사로부터  여러  번  중단  약속을  받았으나  곧  거짓임이  드러났다.  결국  그는  죽을  때까지  끝내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오랜  단식에  들어간다.  많은  시민단체와  종교  단체에서  동조하는  의미로  촛불시위를  벌이고,  종이  도롱뇽을  접어  연대를  보였다.  단식 100일째가  되던  날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중  단식은  극적으로  끝났다.  환경영향평가를  재조사하기로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환경에  대한  영향은  거의  없다는  조사단의  결론이  나오고  터널 공사는  다시  재개되었다.

그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은  사회뿐만  아니라  불교계  내에서도  논란을  일으켰다.  환경  보전이라는  것의  가치에  대해  합의가  나오지  않았다.  여기에다  목숨을  끊는다는  것이  불교의  이념에  맞는  것이냐는 등의 혼란된 질문들이 동시에 제기되었다.  결국  환경  보전의  이념과 투쟁  방식에  대한  입장  차이를  놓고  논란만  계속 할  뿐  그  본질은  사유되지  못했다. 특히  그의  투쟁방식에  대해서  여러  논란이  일어났다.  철  같은  의지에  비타협적이고,  특히  비구도  아닌  이  비구니의  행동에  정부,  건설업계  모두가  당황하였다.  지율스님의  환경운동에  대해  여성이라는  요소를  고려치  않을  수  없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우석훈  교수는, 지율이  만일  비구였다면  그렇게  사회적으로  돌팔매질을  받았을까  하고  자문하면서,  지율에  대한  사회의  평가에  한국  사회의  젠더  이슈가 반영되어  있다고  말한다.

‘철과  같은  의지’를  가진  이 ‘연약한  비구니’의  행동은  여성에  대한  한국  사회의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철의 의지를 가진 여자’란  옛날에  고생하시던  우리들의  어머니들을  그렇게  묘사해왔듯이  우리에게  안정감을 불러일으켜  주는  익숙한  개념이지만, '비타협적인  여자'란  말은  우리에게  너무나  낮선  개념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흔히  부드럽고 타협적이며  후원적이고  보조하는  사람으로  이해되고  기대되는  것이 현실이다.  비타협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밀어  붙이는  남성을  긍정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용어들은  여럿  있지만,  여성의  비타협성을  표현하는  방법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사람은  그를  요승(妖僧)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어떤  자질의  결여로  간주되었다.  흔히, 방법론적  급진성은  이념의  순수성이  있다면  동정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지율스님의  경우는  급진성  그  자체가  집중적으로  공격되었다.  

그의  비타협적인  투쟁방법에  대해서는  그의  지원자들조차  등을  돌렸다. 대중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을  뿐만  아니라,  일부  환경운동가들도 그를  비판하고  나섰다.  지율  스님은 2004년  시민운동가들에  의해 ‘최고의  시민운동가’로  뽑혔지만  그의 ‘지독한’  운동방식에  운동가들과 스님들  자신들이  가장 ‘불편’해  했다.  왜냐면  그는  통상적인 ‘운동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비구  스님은, "통상 ‘운동’이란  현실적인 타협을  해가며  자신의  동조자를  규합하고  세력을  불려나가는  것이라고  할  때, 주위의  동조  여부를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생명을  던지는  지율  스님을  통상적인 ‘운동가’로서 이해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1) 2005.02.02. 일자한겨례신문,조연현기자보도기사내용.

하지만  지율스님은,  생명이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운동을  위해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누차  밝히고  있다.

그의  생태  운동이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여러  가지  분석  평가가  나왔지만  정작  그의  실천  이념과  사상에  대한  천착은  거의  많지 않은 것 같다.  왜  지율스님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연을  지키려고  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지율스님이  천성산  지기로서의  책무를  통해  자연에  대한  강한  애착과  연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불교는  친환경적인  종교이기  때문에  당연히  환경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것은  그의  몸에  익은  바라고  해석했다.  지율스님이  불교 승려라는  점에서  그의  환경  운동을 '불교환경운동'이라고  불렀으며, 그의  생태적  사유와  행동은  당연히  불교  사상에서  기반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교적인  어휘와  언어들을  특별히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일상의  언어로써  자신의  불교적  이념과  철학을 표현한다.  그는  자신의  웹사이트에  올린  에세이들과  강연  등을  통해 그의  사상을  자주  표현하였다.  그러한  발표된  글의  분석해  보면  그의 생태사상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으로  정리될  수  있다.

1.세계동체-우리의 삶은 연결되어있다

그가  전개한 ‘초록의  공명’ 운동은, “모든  생명뿐만  아니라  세상의 사물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가  깨지면  다른  것도  깨진다”는 신념에  기초하고  있다.  그가  주도한  생태운동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활동은 ‘초록’과 ‘공명’ 두  가지로  압축된다.  그에  있어서  초록이란  자연과  환경을  말하며,  공명이란  같이  느끼고,  같이  소리를 내고  그리고  연대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연대란  활동에서의  연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화엄의  세계관에서  말하듯이  우리의  삶과  존재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세계의  동체를  의미한다. 그의  생태철학은 ‘중중무진  인다라망’으로  얽혀있는  화엄(華嚴)세계의  법계연기(法界緣起)를  생태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  화엄적  세계관에서는  현재  이  순간  각  존재들  간에  발견되는  연관성을  강조한다.

세계의  존재들  간의  상의상자(相依相資)성을  그  자체로  초시간적으로 꿰뚫어  보는  것이다.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요소들  간의  관계성에  주목하여  그  생태적  관련성을  깨닫자는  것이다.  이것을  화엄적  생태관이라  부를  수  있겠다.  그가 인용하는 경전 들을 보아도,  화엄  사상이 그의  철학의  중심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생명사상

그는  환경과  생태를  모두  일종의  생명으로  본다. “샘과  시내는  말라버렸고  강과  바다는  썩어가고  있고  산은  파헤쳐지고 물길은  끊어졌으며  국토는  동강나고  이  흐름을  따라  이동하던  생명체들은 이 땅에서 사라버렸다.  저희  부모님은  이  땅에서  곰과  호랑이를 직접  본  마지막  세대이며  나는  늑대와  여우를  본  마지막  세대이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도롱뇽을  마지막으로  본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이  흐름은  강과  산의  흐름이거나  그  속에  사는  생명체의  흐름일 뿐만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의  흐름이다.  그래서  그를  환경운동가라기 보다는  생명운동가라고  부른다. 그는  산과  자연과  강  속에  들어있는  영성을  본다.  세상의  존재와 자신,  또는  존재들간의  관계에  대한  깨달음,  그것이  바로  그가  주창하는  생태적  사유이다. 그는 「자연의  법(法), 인간의  법(法)」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감은  찰나적인  것이며  자연과의  관계를  깨달아가는  데서  생겨난다. 불교의 수행의 첫걸음은 올바로 보는 것[正見]에서  시작하지만  깨달음의  내용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도리이다. 불을  지피다가,  바람이  댓잎을  흔드는  소리에,  어머니가  아이를  부르는  소리에  문득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자신과의  관계를  확연하게  깨닫고  개오(開悟)하게  된다.”
2) 지율,「자연의 법(法),인간의 법(法)」.


3.다른 생명과의 평등성

불교가  환경  윤리적인  함축을  가지고  있고  나아가  생태적으로  친화적인  종교임을  주장하는  근거로는  교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제시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불교의  생명  중시 사상을  들  수  있다. 출가자  뿐  만  아니라  재가자를  망라하는  모든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윤리적  규범인  계율의  첫  번째가  불살생이다.  이유  없이  다른  생명에게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 모든  생명  있는  것을  죽이는  것을  삼가야  하며,  생명  있는  것에  특별한  외경심을  보이는  것은  율장이나  계율문헌  뿐  만  아니라  불교  경전  의  가르침이나 설화  속에  풍부히  발견된다. 다른 생명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을  대하듯이  다른  존재를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  인간은  육취(六趣)의  존재  중의  하나이다.  인간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여섯가지  형태의  존재형태 중  하나일  뿐이고,  동물이  윤회  전생하는  것처럼  인간도  윤회의  법칙에  적용을  받는다.  

육취  중에서 ‘인간(人間)’과 ‘천상(天上)’은  다른 존재들에  비해  무척  행운의  상태이고,  과거의  선한  행위에  의해  현재 누리는  특권이지만,  이것도  영원한  것은  아니고  현재의  행위에  따라 계속  변해  갈  것이다.  각각의  존재는  업의  결과라는  점에서  동등한 존재적  지위를  가진다.  더군다나  다음  순간의  나의  행위에  의해  다음 생의  존재  형태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나의  가능한  미래로서  축생이나  아수라에  대해,  그들의  불운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  이중  어느 삶이  다른  어느  것보다  더  우위를  차지하거나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더  선호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자신의  존재  형태나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초월적인  존재  등에  의해서  정해진  것이  아니므로,  그 초월자의  의도를  가늠해서  나의  현재  존재  형태가  선호에  의한  것인가  또는  그  의도  속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인가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  현재의  존재  형태에  대해서  그것이  옳다  그르다  하는  도덕적인  관점을  투사하는  것도  초월자의  의도를  내면화하여  투사한  것일 뿐이다.  다른  존재에  대해  공평무사한  관점을  가지는  것,  이것을  다른  존재에  대해  평등한  관점을  가지는  것이다.  지금  인간으로  태어난 이  행운에  대해  더욱  감사하게  느끼고  다른  존재들에  대해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며  더  이상  나쁜  업을  짓지  말라는  가르침이  경전  속에는  무수히  나타난다.  실제로  사찰에서  매끼니  식사  후에  그릇을  닦은 물을  건물  밖에  내  놓아  아귀에게  주는  의식은,  관계  속에  놓여진  존재들의  다른  존재에  대한  공감의  표현이다.
3) 이단락은,졸고,「불교와환경,과연동행자인가:이론적가치와실천적전망」, 󰡔인간.환경.미래󰡕 6호 (2011 봄)에 이미발표된 내용을 정리한것

4.내몸과 산하대지가 하나임을 깨달음

‘생태적’이란  말은  많은  고민을  요구하는  개념이다.  생태학이  학문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논의들과  도전들이  나타났다. 특히  생태라는  것은  환경을  하나의  유기적인  세계관으로  보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은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하여  환경과의  조화로운  관계이다.

계를  정립하자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생명의 먹이사슬  속에서  하나의  삶을  위해서  다른  하나의  삶이  희생된다.  생태계간의  이익이  충돌할  때  인간을  위한  생태학은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지율스님의  생태관에서  인간이란  다른  생명이나,  아니  무생물의  환경조차도  누구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  존재는  아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싼  여러  존재들끼리  서로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나와 산하대지는  한  몸이다. 100일간의  단식을  끝내고서  그는,

“사람들은  내게 ‘왜  극단적인  방법으로  단식을  하냐’고  묻지만,  우리의  산하대지가, 산에는  물이  없고, 시내에도  물이  마르고, 밤하늘엔  별빛이  죽어가고, 산천의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은  내  한  몸의  단식에  비할  수  없을  만치  극단적인  아니  너무  절박한  상황이다.…사람들은  내  몸이  말라감을  걱정하지만, 내  몸의  뒤로  산하대지가  말라감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이  몸은  사대(四大)로  돌아갈  것이며  그것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가  인간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도  그의  불교적 신념을  강하게  반영한다.  그러나  옛날  유마  거사가  중생의  병을  어떻게  보아야  하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이  몸은  환상과  같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버리거나  해서는  안  되고  소중히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4) 우리  몸은  무상(無常)하고  또한  자연도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무상과  공(空)을  깨달은  자만이  무상한  존재들에  대한 배려와  자비를  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몸이나  삶은  소중한  것이지만  다른  존재들의  몸도  이와  마찬가지로  소중하다.  하나의  몸이  다른  몸을  살릴  수  있을  때,  이  몸을  기꺼이  던지겠다고  하는  것이다.

4) Chulalongkorn 대학의Suwanna Satha-Anand 교수는"The BuddhistBody: From Object of Desire to Subject of Mindfulness"(in NewEssays in Comparative Aesthetics, Edited by Robert Wilkinson,Newcastle,UK:CambridgeScholarsPublishing,2007)에서, 몸이욕망의
대상이고극복해야하는것이지만몸은또한수행과깨달음이일어나는장소임을말하고있다.


그가  마지막까지의  단식을  감행한  것도  이러한  정신으로  보아야  한다.  몸의  무상성과  공을  아는  자는  그  두  가지  몸  간의  차별성을  넘어설 수 있다. 무차별성을  인식하고  나온  주체적인  결정이다.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주체적이고  윤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는  자기 몸의  주인이고  신념의  주체이며  따라서  자신의  몸에  대해  선택할  수 있었다.

5.자연과 인간간의 소통

그는 이 사회의 위기는 "자연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의 위기"라고  말하고  있다.  자연의  언어는  특히  시각적인  표출을  통해 잘  드러난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지만  그것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산다. 그것은  소통의  부재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끼리,  그리고  인간과  자연끼리.  이러한  자연의  언어를  그는  미학적  언어로  바꾸어  전달하고  있다.  지율스님은  이러한  생태적  감수성  내지  생명에  대한  영감을  일반 대중들과  같이  나누고자  하였고,  특히 100일  단식  이후  그의  활동의 초점은  기존의 ‘정치적인’ 투쟁지향의  환경운동보다는, 일반  대중에게 생명의  존엄과  상호의존을  각성시키기  위한  교육활동에  초점을  두었다.  그는  작가  수준의  사진  솜씨를  가지고  있어서  훼손되는  자연  환경을  찍는  고발성  사진이나  시골  고즈넉한  마을의  농사  풍경  뿐  만아니라,  거미줄에  걸린  물방울을  찍은  예술적  감수성이  묻어나는  사진들에  글을  곁들이고  음악을  곁들여  포토  저널로  만들었다.  이것을 인터넷  웹사이트를  통해  정기적으로  올려서  대중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였다. 그의  포토저널리즘은, 무상하고  공하며  연기로  얽힌  우리의 삶의  파라독스를  극도의  미학적  감각으로  상징하고  있다.  무상,  공, 연기의  불교적  세계관을  통합적,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사진과  글이  아닌  다음과  같은  더욱  직접적인 소통 방식도 쓴다.  나무를  껴안음으로써  몸으로써  교감하고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듣고  그  내음을  맡기도  한다.

“때때로  저  역시  나무를  껴안고  교감을  나누는  버릇이  있습니다. 나무를  껴안고  있으면  거칠지만  따뜻한  나무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땅에  뿌리를  내리고  나무뿌리와  제  뿌리가  엉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며  우리가  이  땅에  뿌리  내린  같은  생명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나무를  껴안고  눈을  감으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작은  소리도  느낄  수  있으며  그  소리를  들으면  나는  바람이기도  하고  구름이기도  하며  바위이기도  하고  풀잎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체험  속에서  바람소리  물소리가  깨달음의  소리라고  연관의  세계를  말씀하신  선인(先人)들의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5) 2005년 6월 22일, 이화대학교포스코관209호에서 열린세계여성학대회의기조강연,“천성산 도롱뇽을위한외로운투쟁”중에서.

IV. 생태적  감수성과  여성주의

또한  그의  생명  사상은  여성의  생태적  감수성에  기반하고  있다. 그의  초록의  공명  생명운동은 "여성의  모성적  힘으로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고자  하는  에코페미니즘의  실천이며,  한국의  여성운동의  영성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6) 2005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열린세계여성학대회에지율스님을키노트스피커로초청하는신청서의일부.또한이여성학대회기간중에도롱뇽을수놓은퀼트작품을만들어전시하는행사가아울러이어졌다.

학대회에서  한  기조연설에서  그는  여성에게  생태학적  변혁을  이룰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사회는  도롱뇽이라고  하는  작은  생명체에게  아직  관대하지  못하며  이  문제에  냉소적이고  비판적입니다. 저는  이  풀기  어려운  문제의  답이  아이를  기르는  어머님들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환경운동은  여성의  몫이라는  생각을  자주하여  왔습니다. 동양에서는  음과  양(여성과  남성)의  서로  다른  역할과  조화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음을 땅이라고  하고  양을  하늘이라고  표현합니다. 양의  힘은  역동적으로  그 힘은  수직적이고  파괴적이나  그  속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음의 힘은  텅  비고  고요하며  넓고  평탄하고  따뜻하고  온화하고  평화롭고 균등합니다. 낳고  기르는  지구적이고  모성적인  본능은  여성적인  역할입니다. 올해  초 100일  단식  중에  제가  느낀  것은, 저의  소생이  기적이  아니라  자연의  에너지는  무한하다고  하는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자연의  에너지는  결코  부족함이  없으며, 이  에너지는  누구나에게  평등한  것으로  병들게  하거나  사고팔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7) 지율의 기조강연,"천성산 도롱뇽을위한외로운투쟁"중에서.이행사의기획은김성례세계여성학대회종교분과위원장,사회는조은수,논평은김승혜수녀,이원조원불교교무가맡았다.

에코페미니즘,  또는  생태여성론  또는  생태여성주의란,  생태주의와 여성주의라는  두가지  다른  뿌리에서  나온  사상이  결합되어  나타난  사조이며  현대  여성주의  이론의  중요한  한  가닥을  형성한다.  여성과  남성간의  가부장적  지배관계가  자연과  인간  사이에도  마찬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자연과  인간  또는  자연과  문화  사이에  여성과  남성  간의 지배성과  피지배성의  관계와  유사한  지배  피지배의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즉  남성  여성간의  지배관계와  자연  인간간의  지배관계  간에  강한  유사성이  있다는  성찰에  기반하여  그  관련성에  주목하여  생태  문제에  대해  여러  이론을  제시한다.  에코페미니즘은  그  이론과  지향하는  이념,  그리고  실천  방법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있지만, 그들은  한가지로  여성의  힘과  여성의  윤리로서  생태의  문제를  변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협력,  감성,  전일적  사유,  감동,  그리고  직관은 여성적  원리라  하고,  경쟁적  독단성,  합리주의,  공격성은  남성적  원리이며,  이러한  남성적  원리가  생태에  대한  침탈로  이어진다는  것이  에코  페미니즘의  주장이다.  따라서  생태문제의  해결은  남성적  원리,  자연  정복의  태도를  포기하고  여성주의적  윤리,  자연  존중의  태도를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8) 생태여성론자  문순홍씨는, "단언컨대  가부장적 문명의  야만성에  대한  감수성이  결여된  생태학,  생태주의는  결코  온전한  생태학,  생태주의일  수  없다.  그것은  부족하거나  가짜다.  그리고 여성이  보기에  부족하거나  가짜인  남성  생태주의가  횡행하는  바로  이 현실은  바로  에코  페미니즘의  존립  근거이다"라고  말한다.

8) 에코페미니즘에 대해서는고문순홍씨의󰡔생태학의담론󰡕, 한국불교환경교육원,󰡔생태주의와에코페미니즘󰡕, 여성환경연대인터넷자료등을참조하였다.

9) 고 문순홍씨의󰡔생태학의담론󰡕중에서.여성이  보기에  부족하거나  가짜인  남성  생태주의가  횡행하는  바로  이 현실은  바로  에코  페미니즘의  존립  근거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여성주의  윤리라는  것은  전통적으로  도덕  판단의  기준으로 쓰였던,  합리성과  이성을  원칙으로  하는  윤리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에서  출발한  새로운  윤리학  사조이다.  합리성과  이성을  원칙으로 하는  윤리학은  남성들에  의해  성립된  윤리체계이며,  그러한  합리성과 이성의  논리는  결국  특정  그룹,  즉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는  인간을 위한,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는  남성에  의한  그들에게  통용되는  윤리관과  도덕체계였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생태여성주의는  그러한  윤리관에  기반하여  세워진  인간의  문명이  결국은  환경의  파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통렬한  자기반성과  비판적  인식을  내포한다. 지율스님은  여성이라는  단어를  그리  많이  쓰지도  않고,  자신을  물론  에코페미니스트라고  부른  적도  없으며,  에코페미니즘의  이론들을 거론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는  환경운동은  여성의  몫이라고  했으며, “남성과  다른  관점으로  이  사회를  보는  것,  그  자체가  여성의  힘”이라고  했다.  어머니로서의  여성  뿐만이  아니라,  여성성으로서,  여성의 감수성으로,  미래를  위해  생태적인  생명관과  세계관을  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체적  여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성적  가치와  원리가  독점하는  세상에서  잊혀져왔던  그  여성성을  회복하고자하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여성성에  대한  신념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다음에서  말할  새로운  종류의  가치,  대안적  가치관과  관련이  있다.
10) 여성주의 윤리학에대해서는,허라금,󰡔원칙의윤리에서여성주의윤리로󰡕 (철학과 현실사,2004)참조.


V. 생태와  자연의  가치는  경제적  가치와  다르다

새로운  종류의  가치

자연은  무한하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부족한  것이  아니며,  누구에게도 평등하게 쓰여질 권리가 있다.  그것을  일정한  집단이  소유권을 주장하고  경제적  가치로  환원할  수  없다.  이것은  생태여성학자들에 의해서  생태의  파괴와  인간의  삶의  파괴를  동치시키는  근거의  하나이기도  하다.  즉  현재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는  경제적  가치인데, 이러한  기준에  의해서는,  예를  들어  여성의  양육과  보살핌은  이윤으로  전환되지  않는  노동으로  경제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  자연의  가치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은  흔히  자연  파괴와  오염이  인간에게  가져오는  부정적  효과를  통해서  비로소  자연의  가치를  인지하게  된다.  그러나  자연의  가치는  경제적  가치로  잴  수  없다.  자연은  그  자체로  경제적  가치를  산출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생존을  지속시켜준다는  점에서 가치를 가진다.  인간은  흔히  스스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한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노동과  생산에  모든  가치를  부여한다.  이것도  또한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의  기여와  여성의  노동에  대한  평가와  유사하다.

지율스님은,  생태와  자연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이러한  경제적  가치에  의해  평가될  수  없다고  한다.  흔히  자연에  대한  논의는  현실적 조건에서  비롯한다.  그래서  친생태적  생활  방식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흔히  문화적  집단의식에  의해,  경제적  합리성,  또는  정치적  논리에  의해  가로막힌다. 이것을  지율스님은  이렇게  표현한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  문제를  이야기하면  경제라는  몽둥이를  들고  나오지만  빈곤의  직접적인  이유는  부의  균등  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물질적  풍요는  빈부의  격차를  한없이  높이고 빈부의  계급사회는  많은  부조리를  안고  있습니다.”
11) 지율,2005년 6월 22일, 세계여성학대회의기조강연,“

실제로  그의  생태운동,  또는  생명운동은  결국  경제라는  잣대,  그의 표현대로 ‘경제라는  몽둥이’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가  지적하듯이  빈곤은  부가  축적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축적된  자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물질적  풍요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많은  이들의  물질적  결핍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소유에  집착하는  풍요는  인간의  영혼을  고독하고 메마르고  병들게  하며,  자연의  빛과  소리와  향기를  잃어버림으로써 인간의  영성과  근골은  점점  나약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12) 지율,ibid.

불교적  연기의  관점에서  본다면,  물질적  탐욕과  그것의  추구에  의해  풍요가  쌓이는 것 같지만,  그것은  결국은  자연과  인간과의  연대를  깨고  그  균형을  깸으로써  재앙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  재앙은  결국은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생명은  경제적  가치로는  보잘  것  없는  것일지  몰라도,  다른  창조적인  가치를  지니며,  또  다른  새로운  가치를  불러온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멸종  위기에  처하여  있는  작은  도롱뇽  한  마리에  마음을  모을  때  우리의  생명에너지는  증폭되며  더  많은  창조적  부가가치들이  생겨납니다.” 13)도롱뇽을 위한 외로운투쟁”중에서.

생명은  에너지이며  그것은  훼손시킬  수  없는  것이다.  생명이  증폭되어  새로운  생명이  창조되는  그  가치는  경제적인  잣대로  잴  수  없다는  것이다.


VI. 불신과  이반을  넘어서 - 여성주의  윤리

2009년  지율스님은  자신이  제기한 10원짜리  소송에서  대법원의  승소판결을  받았다.  천성산  공사의  중단으로  인해  국가에  끼친  손해가 수조에  이른다는  언론  보도는  터무니없이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이 결과  피고가  된  신문들은  일제히  정정  보도를  실었다.  이  승소  판결을  얻은  후에  지율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환경에  대한  법은  갈수록  늘어나지만  그  법을  제정한  입법  기관과  사법기관에서  조차  그  환경보호를  개발의  걸림돌로  취급하고  있고  새만금의  판결문에서 보듯 '자연  또한  소중한  가치의  하나이기는  하지만'이라고  자연의  가치를 ‘하지만’이라는  접속사로  수식하며  개발을 '균형감  있는  합리적․이성적  접근방식'  이라  빗대고  환경  보호를 '이상에 치우친  감성적인  접근'으로  매도하고  있다. 전원합의체로  간  새만금의 판결문은  적당한  수식어로  가미되어  있어  을숙도  판결문에서는  토하나  빠트리지  않고  인용되어  있는  것을  보면  새만금  판결문은  개발사업의  날개가  된  셈이었다.”
14) 지율,「자연의 법(法),인간의 법(法)」.

판결문에서  말하는  균형  있는  합리적  이성적  접근  방식이란  무엇일까. 그것을  지율스님은 ‘불신’과 ‘이반’의  논리라고  한다. 진실이  가려질  때,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거짓에  익숙해진다.  그러한  거짓  속에서  자연은  왜곡된다.  또한  그는 “환경적인  위기와  도덕성의  위기는  같은  것”이라는  점을  누차  강조한다.  결국  환경의  위기는  인간성은  위기를  말해  주는  것이며,  윤리성의  회복,  도덕의  회복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신과  이반이  자연과  인간을  갈라놓았고  나아가  자연의 인간에  대한  복속을  정당화  시켜준  것이다.

에코페미니즘  이론에  따르면,  여성의  남성  복속과  불평등의  시원은  여성은 ‘감성적’이고 ‘비합리적’ 형태의  사유를  하기  때문에  남성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합리주의  논리이다.  그에  따라  여성에  대한  불신의  이미지가  고착되고  그러한  이미지는  점차  강화되어  남성성  내지  남성적  가치를  우월한  것으로  보는  사회를  낳게  된다.  이러한  남성성  여성성을  본질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보는데  대해  여성주의자들  내에서도  논란이  있으며,  또한  현대  사회는  여성적  가치를  점점  새롭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의  환경  담론은  개발  지상주의의  이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간의  대립적인  이분법적  인식에  갇혀  있다.  그  논리에  따르면,  개발은  정당화되고  자연은  가공되고  복속되어야  하는  것이며,  자연을  통제하는 능력  그것이  인간이  자연보다  우월하다는  증명이다.  이것이  문명사회가  걸어온  길이며  앞으로도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지율스님은,  그러한  합리적  이성주의를  비판하면서,  그러한  이분법을  벗어나는  대안적  사고,  즉  생명에  기반하는  윤리관을 제창한다. 이것은  여성의  감수성을  실천하고  그것을  북돋움으로써, 강함과  합리성의  눈만으로  보지  못하는  작고  약하고  부드럽고  수동적인 고  가느다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자는  것이다.  그는  한번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바람이  부는  들판에  서있는  풀을  보고  바람이  불어  풀을  눕혀  이긴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것을, 바람이  불면  풀들은  저절로  드러누워  바람의  손길을  기다린다고  표현한다.” 자연  세계  밖에  국외자로  서서  대상화할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들어가  그  속에서  자연간의  교감과  교류를  느끼면서  평등한  입장이  되자는  것이다. “나무를  껴안고  느끼는  나뭇잎의  작은  소리를 들을  때,  그  소리를  듣는  나는,  바람이기도  하고  구름이기도  하며  바위이기도  하고  풀잎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작은  생명에게  까지  마음을  회향  할  수  있을  때  개인적인  평화와  지구적인  평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크게  외친다.  환경  문제와  생태문제는  결국 우리에게  사유체계와  가치관의  전면적  전환을  요구한다는  점을  그는 우리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그가  지향하는  자연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평등하게  존중하며  하나가  되는  삶의  태도는, 결국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초록 (2014/12/08 08:49:55)

“가장 큰 불행은 밤마다 수없이 많은 반짝이는 별이 나를 굽어보고 있지만 고개를 들어 보려 하지 않고 아침마다 어김없이 황금빛 태양이 문밖에 서성이지만 맞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자연과 나를 영원한 공간으로 분리하여 가까이하려 하지 않고 사물에 현혹되어 욕망의 추구에 마음을 달리게 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다. 우리에겐 자신의 존재가 완전체로 이 세상에 왔다는 것과 자신이 태어난 별과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조우하는 개오(開悟)의 시간이 필요하다.” 15) 지율,「자연의 법(法),인간의 법(法)」.

그는 생태적이고, 전체적(holistic)이며, 감성적인 사유를 우리에게 제안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개오(開悟), 즉 눈뜸과 깨달음을 요구한다.

VII. 나가는 말 - 생명에 대안은 없다

2009년 4대강 사업이 시작되고 지율스님이 긴 정적을 깨고 어렵게 대중 앞에 나타났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나는 이 세상에 소풍을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천성산 문제를 통해 그들이 몰수하여 간 것은 진실이었고, 이반된 것은 인심이었으며, 피폐하여진 것은 우리의 산하였기 때문이다.”16) 지율,"조선일보 승소 판결에 부쳐"(2009.09.02.)

한번 가해진 피해는 회복이 불가능하고, 우리가 이대로 자연 파괴를 계속한다면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은 우리 아이들과 미래의 아이들이라는 점을 그는 강조한다. 다른 생명의 복지와 좋은 삶을 위한 우리는 의무는 무엇일까. 우리는 과연 소풍으로만 이 세상에 온 것일까. 그것을 같이 고민하자고 제창한다. 그의 다음 말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저는 지난 5달 동안 혼자 낙동강 가를 하염없이 떠다녔습니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무너져가고 있는 산하를 보며 주저앉아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자식 앞에 울지 못하는 부모처럼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이제 저는 그들이 지시하고 있는 그 혼란스러운 지점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천성산이 순결한 아름다움으로 저를 불러 세웠다면 강은 그 장엄함과 비장함으로 저를 불러 세우네요. 계절은 문득 스산합니다.” 17)지율,“조선일보 승소 판결에 부쳐”(2009.09.02.)

지율스님의 생명운동은 자연에 대한 윤리성의 회복을 우리들에게 요청한다. 그는 이성과 합리성의 윤리를 넘어서 생태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하는 배려와 존중의 여성주의 윤리를 제안한다. 그리고 그것에 눈뜰 것을 요구한다. 생태의 문제는 생명의 문제이며, 여기에 다른 대안은 없다. 그의 말을 빌면, “그 자체가 질문이고 답이었기 때문”이다. 18)지율,「자연의 법(法),인간의 법(法)」.

‘자연의 법’과 ‘인간의 법’은 그렇게 다른 것이다.


조은수 서울대학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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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Jiyul Sunim’s Eco-Feminist Activism and its Buddhist FoundationsCho, Eun-Su This paper introduces and explores Jiyul Sunim’s efforts to protect nature and the environment in Korea, an undertaking necessitated by the widespread and rapid industrialization and growth in modern Korea. Although her efforts in fighting for nature have created a huge response in Korean society and have elicited many analyses of her protest movement, there has as of yet been no discussion of the strong Buddhist convictions that underlie her activism,particularly the Huayen doctrine of dependent causality. Her Green Resonance movement is intended to raise awareness and sensitivity about our own reciprocity of being, as it is inherently connected to nature. That is, we too are connected to nature, although we can become insensitive to that connection through a lack of communication. This broader vision of connection gestures also to a broader approach to communication, through channels other than language and media. The language of nature, for example, is especially expressed through visual presentations. Jiyul Sunim’s exceptionally visual presentations in photo journals and other digital media represent her holistic vision of the Buddhist world. Her activism offers an exceptional case study of the application of Buddhist ideas on nature and environmentalism, while also demonstrating a particular interpretation of eco-feminism drawn from Buddhist concepts. Keywords:Jiyul Sunim, Eco-feminism, Huayan Thought, Dharma-Dhatu, Buddhist Ec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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