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공명

(2013-08-28 09:09:27)
초록
진보평론 중

자료 찾다가 우연찮게 보게 된 글


진보평론 52호(2012년 여름호) 정세   손호철/ 서강대교수/ 정치학


1.

“터질 것이 터졌다”. 최근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통합진보당의 부정선거 파문을 접하며 보인개인적인 첫 반응이었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진보진영의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 이번 사건은 일회성 사건이 결코 아니다. 2000년 노회찬의원 등 평등파가 민주노동당을 만들자 운동권의 주류인 자주파가 소위 ‘군자산의 약속’을 통해 이 당에 들어가 당을 장악하기로 결정한 이후 위장전입, 당비대납 등 비민주적이고 엽기적인 방식을 통해 당을 장악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 사건이 일회성사건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에서 통합진보당으로 이어지는 진보정당 ‘주류 당권파’의 오래된 실천이었음은 이번 사건이 부정선거가 아니라 “기존의 잘못된 관행”과 “서로 다른 조직문화”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당권파 이의엽 정책위의장의 해명이 역설적으로 잘 입증해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지난해 ‘진보정치세력의 연대를 위한 교수연구자 모임’(진보교연)을 만들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갈라진 진보정치세력을 통합하려고 노력하면서 실감한 것은 이 같은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이 불모지에서 공들여 만들어 놓은 지구당과 당을 빼앗긴 진보신당 관계자들의 트라우마가 너무도 깊고 커서 설득이 불가능한 경우가 너무 많았다는 사실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했으면서 통합을 위해 적극 나섰던 조돈문 가톨릭대교수조차도 이 같은 트라우마 때문에 “진보신당으로 분당 후 악몽을 꾸는 습관이 없어져 너무 편했는데 통합을 이야기하자 다시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고 증언했다.

물론 이번 사건이 어떤 방식으로 끝을 맺을 것인가는 알 수 없다. 결국 경기동부연합을 중심으로 한 당권파와 비당권파가 분당을 할 것인지, 아니면 당권파의 비민주적 관행에 제동이 걸리고 당이 민주화될 것인지, 아니면 또 한 차례의 봉합으로 끝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찌됐건 현재처럼 당권파가 조사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중앙위원회의 비례대표당선자 사퇴 결정에 저항하면 할수록, 자신들이 얼마나 부도덕한 집단인가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번 사태를 바라보며 역사에 대해, 특히 ‘역사의 간계’ 내지 ‘역사의 간지’에 대해 다시한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사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많은 사람들과 언론이 관심을 갖듯이 왜 이 같은 사건이 터졌는가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말도 되지 않는, (이의엽위원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잘못된 관행”이 왜 이제 서야 비로소 사회적 의제가 되어 논쟁이 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말도 되지 않는 이 같은 관행이 왜 그동안은 사회적 의제가 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물론 과거에도 이 같은 문제들이 민주노동당에서 문제가 되어 쟁점이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본격적인 사회적 의제가 되어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내부논쟁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다면 과거의 사건들과 달리 이번 사건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쟁점이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답으로 여러 가지를 상정할 수 있다. 첫째, 과거의 경우 민주노동당의 세력이 약해 사회적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아 사회적 의제로 발전했을 수 있다. 그러나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10석으로 일거에 제 3당으로 부상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주장은 별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물론 야권연대로 2004년보다 힘이 세졌다고 보아야 하지만 말이다. 둘째, 과거에 비해 이번의 경우 부정선거의 정도가 심해 사회적 쟁점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이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위원장이 자백한 “기존의 잘못된 관행”을 고려하면 정도의 차이가 그리 클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세 번째로 비당권파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대응하는 방식의 차이이다. 과거에는 이 문제를 진보세력의 치부라고 생각해 쉬쉬하며 내부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면 이번에는 이를 공개적으로 제기하고 만일 문제를 계속 은폐하려 하는 경우 검찰조사를 받는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나는 첫 번째와 두 번째도 관계가 있겠지만 세 번째 차이가 중요한 변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목할 것은 이번 사건을 처음 제기하고 나섰고 계속 주도하고 있는 것이 이청호 부산금정구의원 등 진보정당 움직임에 뒤늦게 합류한 국민참여당 세력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진보신당으로 분당한 평등파의 경우 같은 운동권출신으로 같은 진보운동을 해온 ‘진보운동권 문화’ 때문에 이 문제를 보수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을 정도로 공개적으로, 공격적으로 제기하고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이의엽위원장의 표현대로 전혀 “다른 조직 문화”를 가진 국민참여당 관계자들은 이 같은 한계를 넘어서 상식이하의 불의를 참지 못하고 문제를 공격적으로 제기하고 나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싶다. 게다가 과거에는 평등파가 힘이 약해 고립되었다면 이번에는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의 평등파와 유시민의 국민참여당세력이 힘을 합쳐 반대파의 힘도 세졌다.

이 같은 사실과 관련해, 주목할 또 다른 사실은 진보신당내 통합파, 민주노동당의 비당권파. 노동계 등 진보진영내의 많은 반대에도 통합진보당 건설에 국민참여당의 참여를 주장한 것이 바로 이정희대표 등 민주노동당, 그리고 현재의 통합진보당의 당권파였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짚어 보기 위해 우리의 시선을 진보정당 통합움직임이 활발했던 1년전으로 되돌릴 필요가 있다.

1년 전 진보교연 등 다양한 진보세력들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가운데 이정희 당시 민주노동당대표와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가 [미래의 진보]라는 책을 함께 집필해 책 콘서트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보세력과는 거리가 먼 국민참여당을 포함한 진보통합론이 ‘비민주진보대통합론’이라는 이름으로 민주노동당과 이대표를 중심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진보통합논의는 내가 이 지면에 소개했듯이 1)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먼저 통합하고 민주당 등 자유주의세력과 조건부로 선거연합을 한다는 ‘선 진보통합, 후 (조건부) 민주대연합론’, 2)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이 민주당의 우산아래 들어가야 한다는 ‘빅텐트론’, 3) 민주당을 빼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등이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비민주진보대통합론’의 세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 논쟁을 벌여야 했다.

이중 나를 비롯한 진보교연은 유시민대표와 국민참여당은 당내민주주의 등에서 일부 진보성이 있지만 민주당의 무상급식 등 보편적 복지 프로그램을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하는 등 자유주의세력인 민주당보다 더 보수적인 ‘우파자유주의세력’으로 진보정당을 같이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대표와 민주노동당 당권파는 이같은 주장을 무시하고 유시민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며 비민주진보대통합론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특히 이정희대표와 유시민간의 밀월과 비민주진보대통합론은 진보신당내 강경파들의 반발을 야기시켜 진보신당의 통합파가 통합에 필요한 3분2 득표에 실패하게 만드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그러면 왜 당권파는 우파자유주의세력인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주장했을까? 정확히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첫째, 몸집 불리기이다. 전통적 진보세력만이 아니라 국민참여당 지지자들에게까지 외연을 넓히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둘째, 이와 관련이 있지만, ‘대중적 진보정당론’이라는 ‘우경화’이다. 당권파는 오랫동안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세력에 대한 ‘비판적지지’ 등 ‘대중노선’을 강조해 온 만큼 대중노선이란 이름아래 당의 우경화를 시도한 것이다. 셋째, 당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전술일 가능성이다. 민주노동당이 진보신당과 통합할 경우 민주노동당의 비당권파와 진보신당세력이 연합해 자신들의 패권을 무너트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국민참여당을 끌어들여 이와 연합해 반대연합을 견제하고 패권을 유지하려 했을 가능성이다. 네 번째, 진보신당의 강경파를 자극해 진보신당이 스스로 통합을 거부함으로써 고사하기 위한 책략일 가능성이다. 사실 국민참여당과의 통합론은 진보신당이 통합을 거부하게 만드는데 기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진보신당이 이번 총선에서 1%대의 저조한 득표에 그쳐 당이 해산당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외형적으로 보면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은 이번 사건이 터져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당권파가 의도한대로 소기의 목적을 어느 정도 이룬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래의 진보]의 북콘서트로 시작된 이정희-유시민의 밀월은 일년도 되지 않아 파국으로 끝나가고 있다. 유시민공동대표와 국민참여당파는 이정희공동대표와 당권파가 아니라 심상정공동대표 등 평등파와 연대해 당권파와 싸우고 있다. 이제 당권파에서는 문제폭로에 앞장선 국민참여당세력에 대해 “동지로 위장해 세작질을 일삼는 일군의 세력”이라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특히 당권파의 숨은 실세로 알려진 이석기가 최근 인터뷰에서 국참당과의 통합을 자신이 아이디어를 내서 반대하는 세력들을 설득하고 관철시켰는데 이들에게 당하고 있다며 배신감을 토로했다. 또 당권파와 연관이 깊은 것으로 이번에 밝혀진 [민중의 소리]의 경우도 편집장이 자신들이 여러 보도와 논평들을 통해 국참당과의 통합을 지지층들에게 설득했었는데 이에 대해 사과한다는 사과글까지 게재했다.

정말 재미있는 것은 이정희 대표와 당권파가 비당권파와 다른 진보세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어부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 때문에 바로 이 같은 곤욕을 치르고 조직의 위기를 자초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자업자득’이고 자기 꾀에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역사의 간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잘못된 서구중심주의적 시각이긴 하지만 영국의 인도지배를 분석한 글에서 영국의 식민주의가 탐욕의 산물이고 잔인무도한 부도덕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도의 오랜 봉건적 질서를 파괴하기 위한 ‘역사의 도구’라고 분석한 바 있다. 통합진보당 사태를 바라보며 문득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된다. 통합진보당에 유시민과 국민참여당을 참여시킨 것은 이들의 이념을 생각할 때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통합진보당 참여를 통해 오랫동안 진보진영의 발전을 가로 막아온 자주파 당권파의 패권과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 엄청난 역사적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만일 유시민 공동대표와 국민참여당세력이 이번 사건을 통해 경기동부연합으로 상징되는 당권파의 패권과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면 이는 이들이 한국정치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마르크스의 표현처럼 유시민은 자주파 당권파의 패권을 해체하고 한국의 진보정당이 새로 태어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역사의 도구’인가?

2.

이번 사태를 보면서 정말 내가 진보라는 것이 너무도 부끄럽다. 물론 진보라는 것이 부끄럽게 느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90년대 초인가 학생운동세력이 경찰프락치를 잡아 심문을 한다며 고문해 죽인 것을 보면서 너무도 부끄러웠다. 또 진보세력의 다수파가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 침묵할 때, 탈북자들의 인권에 대해 보수정치인이 단식농성을 하는 데도 진보라는 사람들이 침묵할 때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이번만큼 부끄럽지는 않았다. 이승만시대를 연상하는 부정선거도 선거지만, 이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말도 되지 않는 궤변으로 정당화하려는 경기동부연합 등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행태는 정말 나를 절망하게 만든다. 아니 여러 표가 한꺼번에 붙어서 나온 몰표에 대해 풀이 다시 붙었기 때문인지 모르지 않느냐고 답하는 사람들에 대해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런 사람들이 진보의 대표이고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라니, 믿고 싶지가 않다. 정말 진보가 저런 것이라면, “나는 진보가 아니다”라고 서울광장에 나가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부정시비선거에 의해 당선된 비례대표당선자들의 사퇴론에 대해 진성당원제도를 논리로 내세워 당원투표를 하자는 당권파의 주장도 그러하다. 비례대표를 당선시켜 준 것, 통합진보당이 막대한 국고보조금을 받도록 만들어준 것이 한줌밖에 되지 않는 당원들이 아니라 그들의 수십 배에 달하는 이백만의 유권자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말이 되지 않는 주장이다.

비분강개를 넘어서 정작 문제는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 같은 괴물을 만들어냈느냐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파시즘의 야만에 대항해 싸운다는 이름아래 적을 닮아가 적보다 더 흉악한 괴물이 되고만 스탈린주의의 비극처럼 군사독재와 광주의 비극은 적과 싸운다는 이름 아래 ‘적보다 더 흉물스러운 괴물’을 진보진영 속에 만들어내고 만 것이 아닌가? 최소한 이승만정권도 몰표에 대해 풀이 다시 붙어서 그랬다는 식의 억지는 하지 않았다. 우리는 주사파의 비극을 나와 무관한 남의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아무리 진보를 이야기해도 우리역시 언제든지 적과 싸운다는 이름아래 적보다 더 무서운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진보를 자처해온 사람으로 진짜 부끄러운 것은 이처럼 진보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준사이비종교집단’들이 진보를 대표하는 다수가 되도록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하는 자괴감 때문이다. 그들이 지역으로 내려가 사람들을 조직하고 힘을 키우고 있을 때 소위 ‘진보좌파 세력들’은 세미나 룸에서 고상한 논쟁만 하고 있었던 것이 현재와 같은 상황을 낳은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면 너무 나간 것인가? 이 점에서 우리는 이번 통진당 사태를 만들어낸 사실상의 공범이 아닌가? 사실 민주노총, 나아가 진보언론을 포함한 언론조차도 다 알려진 이들의 패권주의적 행태에 대해 그동안 침묵함으로써 현재에 이르는데 일조한 것이 아닌가? 특히 당권파의 만행에 줄곧 동반자로 함께 해온 민주노총은 통합진보당에 혁신을 주문하기에 앞서 자기 스스로의 발본적인 자기반성과 혁신이 필요하다.

물론 이들의 비민주적 관행과 패권주의는 이들의 또 다른 특징인 종북주의와 상당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 둘은 어느 정도 분리된 문제이기도 하며 이번 문제는 패권주의와 관련된 것이지 직접적으로 종북주의의 문제는 아니다. 이 같은 사실과 관련하여,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번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서, 일부 보수언론들이 보여주듯이 통합진보당의 당권파를 소위 ‘종북주의’를 이유로 공안적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

“5백23만 몇 천 몇 개의 벽돌”. 진보운동의 절정이었던 90년대 초 유학에서 돌아와 취직한 한 대학에서 발견한 팸플릿의 제목이었다. 운동권 학생회가 신입생들 교육을 위해 만든 것이었는데 북한의 김일성 전 주석이 한 공장 건설현장의 현지지도를 나가서 “저 공장을 짓는데 (정확한 숫자는 잊어버렸지만) 5백 23만 몇 천 몇 개의 벽돌이 들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대로 맞았다는 내용이었다. 그 문건을 읽고 유치한 개인숭배에 너무도 충격을 받았다. 이후 과거사 진상조사 일을 하면서 북한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소위 주체사상파(주사파)들이 김 전주석에게 충성맹세문과 생일선물을 보낸 것이 조작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또 한번 충격에 빠진 적이 있다. 건전한 지성과 상식이 마비된 ‘사이비 종교집단’이 아니라면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한가?

그러나 충격에도 명백한 내란행위가 아닌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의 일반민주주의적 권리는 주체사상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주사파의 사상의 자유도 보장되어야 하고 광화문에서 “김일성 만세, 김정은 만세”를 불러도 처벌해서는 안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공권력이나 공안논리가 아니라 민심이다.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한 검찰의 개입은 이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물론 통합진보당은 지난 총선에서 10%가 넘는 240만표를 얻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당을 이끌어온 당권파는 주사파로 의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240만명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체사상에 동조해 표를 던졌겠는가? 오히려 국가보안법과 공안논리가 이들을 지하에서 자신들의 실체를 감추고 위장된 형태로 움직임으로써 대중을 호도하도록 만드는데 기여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주사파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한 뒤 다양한 진보세력들이 북한과 한반도 문제, 그리고 주체사상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쟁을 하고 국민들은 이를 보고 선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럴 경우 주사파는 몰락하고 고립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국가보안법의 존재, 나아가 역대정부의 공안탄압이 일찍이 사라졌어야할 주사파를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통합진보당 사태도 그러하다. 이석기를 비롯한 당권파는 갈수록 비상식적인 언행이 폭로되면서 점점 고립되어 고사직전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출당조치를 피하기 위해 경기도로 주소를 옮겼지만 이는 위장전입 논쟁으로 비화되어 여론은 더욱 싸늘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국 그들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인 민심의 심판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언론들이 자꾸 문제를 종북주의로 몰고 가고 이들을 겨냥해 검찰이 공권력을 동원하면서 문제가 복잡해지고 있다.

당의 고발도 아니고 외부 제 3자의 고발을 내세워 정당내부 문제에 검찰이 개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전례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번 문제 해결에도 부정적 영향이 우려된다. 물론 검찰이 당권파의 부정선거와 비도덕성에 대한 결정적인 물증을 포착하여 이들에게 최후의 한방을 날릴 수도 있다. 그러나 검찰의 개입이 이들을 공안논리의 희생자 내지 순교자로 생각하게 만들고 진보적 유권자들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킬까봐 걱정이 된다. 게다가 검찰이 이번 수사를 부정선거 등을 넘어서 종북주의 문제로 끌고 갈 경우 더욱 그 같은 동정심은 커질 가능성이 있다. 주사파에 대한 해법은 공안이 아니라 민심이다. 아니 검찰도 이를 알면서도, 아니 잘 알기에, 주사파를 살려주기 위한 고도의 전략(주사파가 괴멸하고 진보정당이 새로 태어나는 경우 그 위력이 커질 것을 우려해)적 판단에 의해 공권력을 동원해 개입하고 있는 것인가? 검찰의 아이큐가 그 정도 되나?

3.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이와 관련해, 주목할 것은 이번 사태로 운동권의 암적 존재인 주사파가 타격을 받게 됐지만 그 수혜자는 엉뚱한 세력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즉 그 수혜자는 진보좌파나 진보신당 세력 등이 아니라 오히려 유시민과 국참당 같은 자칭 ‘진보적 자유주의’세력(실질적인 내용면으로는 민주통합당보다 더 보수적인 ‘우파 자유주의’이지만)이 되고 말 가능성이 크다. 유시민은 이번 사태를 통해 잘못된 진보정당을 바로잡는 ‘진보의 투사’, ‘정의의 투사’로 국민들에게 보였다. 또 이번 사태를 통해 신자유주의적 ‘꼴통 노빠’에서 21세기 형 진보정당의 리더로 스스로를 세탁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개인적 수준을 넘어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그것은 어쨌든 현실적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진보정당인 통합진보당이 쇄신이라는 이름아래 자유주의적 방향으로 나갈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통합진보당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겠다는 것은 이제 서막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뭐 피하려다가 뭐 만날 꼴”이 되고 말지 모른다.

정작 문제는 진보좌파가 이번 사태에 대해 정세적으로 개입해서 진보정당운동의 주도권을 잡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구경꾼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통합진보당의 내부정치에 직접 개입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사태를 이 지경으로 끌고 간 중요한 주범인 민주노총의 혁신을 이끌어내지도 못했다. 진보통합연석회의를 재가동시켜 통합진보당 사태에 개입하고 진보정당의 미래방향을 모색하지도 못한 채 통합진보당의 임시대표를 맡은 강기갑 비상대책위 위원장이 자유주의세력들의 수장모임인 원로회의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멍 때리게’ 구경해야 했다. 진보정당대표가 왜 자유주의 수장모임에 가서 머리를 조아리나? 하다못해 진보 좌파세력은 함께 모여 이번 사태의 함의를 논의하고 앞으로의 전략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자리조차 만들지 못했다. 진보신당 역시 어디에 있는지 존재감이 보이지 않았다.

이번 사태의 단기적 해결을 넘어서 ‘왜곡된 진보정당’이라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건전한 진보’, ‘진보좌파’가 힘을 기르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진보정당의 주도권은 과거의 주사파에게서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에게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 주목할 것은 민족해방운동진영이 일찍이 경기동부연합, 광주연합, 울산연합 같이 지역조직을 만든 것이다. 경기동부가 이번 사태의 원흉이 되기는 했지만 지역조직이 민족해방진영의 중요한 힘의 근원이었다는 점에서 진보좌파도 정치운동을 하려면 지역조직을 갖추고 지역운동의 모델을 배워야 한다. 정당과 선거정치는 결국 지역단위(선거구)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진보정치운동은 지역 커뮤니티운동과 결합하지 못하면 실패할 수 없다. 따라서 민중의 집 등 대안적 지역운동모델을 찾아내야 한다.

언론도 현재와 같은 경마중계식의 강자 중심의 보도방식을 넘어서 유권자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다양한 진보세력에 대한 정보를 객관적으로, 그리고 풍부하게 제공해야 한다.

* 이 글은 프레시안 “통합진보당과 역사를 생각한다: 이정희, 유시민, 그리고 역사의 간계”(5.7.)라는 글을 보완한 글임을 밝힙니다.

초록 (2013/09/01 21:41:20)

공교롭게 이 글을 올리고 난 뒤 이석기 사건이 터졌다. 아니, 이미 터져 있었는데 내가 몰랐던 것이다.우연찮게 tv를 보면서 이상했다. 사건의 진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나는 30 쯤은 반공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그 흔적을 지우기는 어렵다. 판단 중지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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